[최종 판결로 돌아본 박현정 전 대표 사건]
"간장 쏟고 손 뻗어 남직원 성추행" 고소 당해
무혐의 처분 이어 "허위사실" 손배 소송도 승소
"여성 상사 성폭력 사례로 회자… 고통 컸을 것"
"집단 내 갈등, 특정인 퇴진으로 해결 시도 안돼"
부하 직원을 성추행한 파렴치한 여성 상사.
박현정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는 이런 치욕적인 꼬리표를 떼내려고 8년 넘게 싸워야 했다. 박 전 대표는 2014년 남성 직원을 강제추행한 가해자로 지목돼 고소를 당했지만, 수사기관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성추행 의혹은 명백한 허위사실로 확인됐으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의 실체도 드러났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을 고소하고 자신을 비방하는 호소문을 작성·배포한 서울시향 직원 곽모씨를 상대로 2015년 허위사실 유포를 문제 삼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수년 동안 언론을 뒤덮었던 '서울시향 사태'에 대한 박 전 대표의 반격이었다. 대법원은 지난달 22일 곽씨가 박 전 대표에게 8,000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 판결로 박 전 대표는 자신에게 씌워졌던 성추행 혐의를 완전히 벗었다.
한국일보는 판결 내용을 토대로 성추행 의혹의 발단이 된 2013년 9월 26일 회식 자리의 진실을 추적했다. 그날 밤 식당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고, 박 전 대표는 왜 누명을 쓰게 된 걸까. 판결문과 진술 조서, 현장검증 보고서 등을 종합해 당일 상황을 다시 들여다봤다.
1)욕하고 2)간장 쏟고 3)성추행하고 4)뒷덜미 잡았다?
2013년 9월 26일 저녁 서울시향과 예술의전당 임직원들은 업무협약(MOU) 체결을 기념해 서울 광화문의 한 횟집에서 저녁식사 겸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1년여 뒤 곽씨를 비롯한 서울시향 직원 10명은 그날 식당에서 박 전 대표가 곽씨를 성추행했다고 주장했다. 조직 내 최고 수장인 여성 상사가 남성 직원을 추행하는 일은 흔치 않은데다, 박 전 대표가 삼성 출신의 엘리트 전문경영인이란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실체적 진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서울시향 직원들은 2014년 12월 박 전 대표를 강제추행과 성희롱, 업무방해 등 혐의로 고소했고, 20여 쪽 분량의 호소문까지 언론에 배포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사실과 다르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여론이 악화하면서 결국 서울시향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곽씨와 곽씨 편에 선 서울시향 직원들이 수사기관에서 주장한 회식 당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1)박 전 대표가 식당에서 만취해 욕설을 하다가 2)상을 내리쳐 간장 등이 쏟아졌고 3)이를 곽씨가 닦아주는 과정에서 박 전 대표가 손을 뻗어 곽씨를 강제추행했으며 4)회식이 끝난 후엔 거리에서 고학찬 당시 예술의전당 대표의 뒷덜미까지 움켜잡았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회식이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어떤 주장도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1)부터 4)까지의 상황을 둘러싼 참석자들의 진술은 서로 배치되고 숱하게 번복됐으며, 호소문에 이름을 올린 서울시향 직원 중엔 당시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도 다수였다. 직원들 주장은 단순히 박 전 대표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 수준을 넘어, 재판부로부터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경험한 것처럼 진술함으로써 실체적 진실 발견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문 밖에서 봤다는 직원 진술, 정작 곽씨 진술로 재연하면 모순
이달 27일 강제추행 사건이 발생했다는 광화문 횟집을 직접 찾아갔다. 정확히 9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참석자들이 앉았던 식당 내 방 위치와 테이블 크기 그리고 테이블 배치 형태는 그대로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방 안에는 4인용 테이블 3개와 2인용 테이블 1개가 있었고, 테이블 간격은 가장 넓게 떨어진 경우에도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였다.
검찰도 식당을 찾은 적이 있다. 검찰은 강제추행 의혹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2017년 3월 박 전 대표와 곽씨, 예술의전당과 서울시향 직원 4명을 데리고 횟집에서 현장 검증을 실시했다. 참석자들이 주장하는 본인 위치에서 박 전 대표와 곽씨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할 수 있는지, 회식 공간을 고려했을 때 박 전 대표가 곽씨를 추행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1)박 전 대표가 문을 등진 채 앉았고 바로 왼쪽엔 서울시향 직원 A씨가 앉았다는 점 2)문 밖에서 서울시향 직원 B씨가 방 내부를 보고 있었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B씨는 수사기관에서 "박 전 대표가 간장 종지를 쏟아서 A씨와 곽씨가 양쪽에서 이를 닦아줬고, 이때 박 전 대표가 곽씨의 넥타이를 잡아당긴 후 곽씨 하반신 쪽으로 손을 뻗는 걸 봤다"며 유일하게 강제추행과 관련해 구체적 진술을 했다.
그러나 검찰의 현장 검증 보고서에 따르면, B씨 진술은 정작 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곽씨 진술과 배치되는 점이 있었다. B씨는 A씨가 박 전 대표 옷을 닦아주는 모습을 봤다고 했지만, 곽씨 진술상 박 전 대표와 A씨는 B씨가 목격했다고 주장한 위치에서 왼쪽으로 한 칸씩 더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현장 검증에서 곽씨와 B씨의 주장을 그대로 재연한 결과 B씨가 서있던 곳에선 A씨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곽씨 편에 서준 B씨의 진술이 정작 곽씨 진술에 의해 반박당한 셈이었다.
예술의전당 임원 등 "욕설과 뒷목 잡기 없었다"
박 전 대표 왼쪽에 앉았던 서울시향 직원 A씨는 박 전 대표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A씨는 수사기관에서 박 전 대표의 강제추행 시도는 물론이고 "간장 종지가 엎어지는 등의 일 자체가 없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반면 "무언가 쏟아졌다"고 진술한 서울시향 직원 C씨는 자신이 방 안에서 이를 목격했는지, 방 밖에서 소리를 들었는지조차 번복하기 일쑤였다.
곽씨는 또 고학찬 당시 예술의전당 대표가 만취한 박 전 대표에게 뒷덜미를 붙잡히는 이례적인 일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고 전 대표는 검찰과 법정에서 일관되게 그런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곽씨는 박 전 대표의 강제추행 시도 직후, 고 전 대표가 ”박 대표 지금 뭐하는 거야. 취했어 가자”라고 말하며 식당을 떠났다고도 진술했지만, 고 전 대표는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일방 소송인 줄 알고 곽씨 측 진술서에 서명... 후회된다"
회식 당시 고학찬 전 대표 주변에 앉았던 예술의전당 직원 2명은 곽씨에게 유리한 진술서에 서명했다가, 이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이를 정정했다. 이들이 당초 곽씨 측 변호사의 부탁을 받고 서명한 진술서에는 "강제추행을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은 없지만, 돌발상황으로 회식이 황급히 마무리됐다는 취지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진술서에 서명했던 예술의전당 직원 D씨는 이후 법정에서 "박 전 대표가 직원들을 일방적으로 고소한 사건이라 듣고 곽씨가 자살 시도까지 했다길래 딱한 마음에 응했다"며 "경찰 조사를 보고 쌍방 고소 사건인 것을 알게 됐고, 정확하게 진술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예술의전당 직원 E씨도 검찰에서 "진술서의 부수적인(강제추행 목격과 관련 없는) 부분을 곽씨 측이 자꾸 이용하려는 걸 보니 그때 왜 온정적인 태도를 취했나 후회가 된다"고 진술했다.
결국 박 전 대표가 곽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018년 8월 1심 재판부는 "모든 상황을 종합했을 때 곽씨가 강제추행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5,000만 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항소심은 곽씨가 서울시향 직원들이 모인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박 전 대표의 사생활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한 점을 추가로 인정해 배상액을 8,000만 원으로 올렸고, 해당 판결은 지난달 22일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번 강제추행 의혹 사건을 "조직 내 갈등을 소통으로 해결하는 대신, 특정인을 퇴진시키는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건"으로 기록했다.
박현정 전 대표가 승소한 손해배상 소송 2심 판결문
어느 집단이든 기존의 질서와 체계에 변화를 주려는 새로운 시도는 그 초기에 내부 세력 간에 마찰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이러한 갈등은 집단 내부의 소통을 통한 충분한 논의와 개선 과정을 거쳐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서울시향에서는 갈등만이 이어졌고, 결국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단체 내의 기존 질서와 체계의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특정인의 압박이나 부적절한 언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특정인을 퇴진시키기 위해 허위사실을 언론 등에 유포하여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는 허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원고(박 전 대표)는 이 사건 호소문 배포 후 (중략)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자질, 도덕성과 업무수행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이미지가 각인됨은 물론 여성 상급자에 의한 대표적인 직장 내 성폭력 사례로 회자됨으로 인해 상당히 큰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2022년 4월 22일 서울고법 판결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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