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얼마 전 한 유명 영화 제작자를 만났다. 그는 배우 이정재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과 연출 데뷔작 ‘헌트’(2022)에 대한, 흔한 호평은 아니었다. 그는 이정재의 발성법에 주목했다. 1990년대 초반 연기에 입문한 그가 2020년대에 어우러지는 발성으로 시대에 발맞춰 가는 점이 놀랍다고 했다.
1990년대 영화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필름으로 촬영했고, 카메라를 여러 대 가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마이크 민감도는 디지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동시녹음이라 현장 소음이 끼어들 여지가 있기도 했다. 배우는 평소와는 다르게 목에 힘을 줘 발성해야 했다. 조금은 과장된 높낮이로 대사를 소화해야 했다(당시 영화를 보면 손발이 조금 오그라드는 이유 중 하나다). 앞의 제작자는 아날로그 시대 굳어진 발성법을 고치기 위해 이정재가 각고의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정재에 대한 평가를 들으며 문득 배우 안성기를 떠올렸다. 이정재보다 훨씬 더 오래전 연기를 시작해 아직까지도 정상에 머물고 있는 전설이라서다. 그는 흑백 영화 후시녹음(촬영이 다 끝나고 주로 성우가 대사를 녹음) 시대에 연기를 시작해 아날로그 동시녹음 시절을 겪었고, 온전히 디지털로 영화를 제작하는 시기를 관통해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안성기가 중견 영화인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배우 중 유일하게 스타라는 애칭이 곁들여진 ‘안스타’로 불리는 이유다.
안성기는 5세 때 연기를 시작했다. 김지미 도금봉 등이 주연한 ‘황혼열차’(1957)를 통해서였다. 안성기가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시절은 한국 영화가 중흥기를 맞았던 때다. 산업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이긴 하나 기술적으로는 열악했다. 영화는 후시녹음으로 만들어졌다. 안성기는 고교 입학과 더불어 연기를 중단하고 또래들 삶으로 돌아갔다.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고,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병사와 아가씨들’(1977)로 연기를 재개했다.
성인 배우 안성기의 얼굴을 널리 알린 영화는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당대 사회현실을 스크린에 반영했다. 1980년대 한국 영화가 이전 시대와 다를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 같은 작품이었다. 서울 변두리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지방에서 올라온 청년 덕배를 연기했다. 이후 안성기는 ‘어둠의 자식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만다라’(1981), ‘꼬방동네 사람들’(1982) 등 1980년대 서두를 장식한 문제작들에 잇따라 출연했다. 그는 급격한 산업화에 소외된 청춘들로 분했다. 80년대 안성기는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겨울 나그네’(1986) 등 여러 흥행작으로 호명되고는 하나 그의 진정한 가치를 품은 영화들은 ‘바람불어 좋은 날’과 ‘꼬방동네 사람들’ 등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한 극장에서 열린 ‘배창호 감독 특별전’ 개막식에서 ‘꼬방동네 사람들’을 오랜만에 다시 마주했다. 안성기가 예전과 달라진 외모로 참석해 그의 혈액암 투병이 알려진 자리였다. 영화는 성인 배우로 막 전성기에 접어든 안성기의 패기 넘치면서도 자신감 가득한 모습을 안고 있다.
안성기는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소매치기 전과자였다가 가족을 위해 새 삶을 살려 애쓰는 주석을 연기했다. 불량한 장발 청년의 모습, 갱생하려는 젊은 가장의 면모, 새 남편과 사는 아내를 되찾기 위한 사내의 분투가 한 얼굴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발성과 말투가 지금 듣기엔 어색하나 안성기가 80~90년대 충무로를 쥐락펴락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8월 개봉한 대작 ‘한산: 용의 출현’ 속 안성기와 비교해 보면 40년 시간을 견디며 그가 어떻게 연기 진화를 해왔는지 가늠할 수 있기도 하다.
2012년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5관왕을 차지한 ‘더 아티스트’(2011)는 몰락한 무성영화 스타 조지 발렌타인(장 뒤자르댕)을 스크린 중심에 둔다. 발렌타인은 유성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명성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가 연인의 도움을 받아 재기한다. ‘안스타’가 발렌타인처럼 고난을 딛고 스크린에서 빛나는 별로 관객과 다시 만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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