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플레이션의 발생과 해법
화폐, 신뢰 기반한 가치 저장 교환 매개
가치에 대한 신뢰, 언제든 무너질 수 있어
2008년 짐바브웨 한 달 800억% 초인플레
역사적으로 재정건전성 강화가 인플레 방지
지나치게 가파른 금리 인상, 경기 침체 불러
편집자주
주로 수치로 묘사되는 경제학은 추상적인 사회과학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으로 결국 구현되는 것은 경제 현상이라고 다르지 않겠죠. 경제 분야 대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들이 문학과 역사학, 철학에 등장하는 경제 이야기를 소개하는 ‘인문학 속 경제’를 3주에 한 번씩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돈’에서 부자가 되려고 여의도 증권가에 들어간 조일현(류준열 분)의 솔직한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사다. 어디 조일현뿐이겠는가? 흥부전은 ‘흥부와 놀부’ 동화로 이어지며 어린이에게 부자가 되려는 과도한 욕망이 어떻게 일을 그르치는지 알려준다. 동화가 예측한 대로, 조일현은 주가 조작에 가담하며 나락에 빠진다. 조일현이 증권회사에 들어갈 때 원했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부자가 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마찬가지다. 경제학에서도 흔히 더 많은 소비가 더 큰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한다. 물론 돈이나 소비가 행복을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새뮤얼슨(참고로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임)은 행복은 소비를 욕망으로 나눈 값이라고 설명한다. 돈을 벌어 소비를 늘리는 것만큼이나 과도한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뜻이다. 욕심이 많으면 번뇌도 많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미 담겨 있다.
돈 얘기를 해보자. 돈 버는 법은 아니고, 화폐의 가치에 대한 얘기다. 물가는 경제 전반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종합해서 나타내는 지표다. 각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화폐로 표시되기에, 물가는 화폐의 가치를 직접 반영한다. 물가가 오르는 것은 화폐 가치의 하락을 뜻하고, 물가가 내려가는 것은 화폐 가치의 상승을 뜻한다. 물가상승 속도를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노란 종이는 그 자체로는 다른 종이와 차이가 없지만, 나중에 이 종이를 상품이나 서비스로 교환할 수 있다는 기대로 인해 가치를 지닌다. 상품의 가치가 이 화폐의 수량으로 표현되면서 화폐는 널리 사용된다. 이처럼 화폐는 가치를 저장하고, 가치 척도의 역할을 하며, 교환을 매개한다. 화폐 가치에 대한 신뢰는 강건한 것이 아니기에 무너질 수도 있고, 그러면 화폐는 백지만도 못해진다. 미래에 가치를 지닐 거라는 신뢰에만 기반하지 않는 화폐도 있다. 과거에는 여러 국가에서 화폐를 은행에 가져가면 일정량의 금과 교환해 주는 금본위제를 채택한 적이 있다. 은행이 망하지 않는다면, 화폐는 일정량의 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2011년 개봉한 미국 영화 ‘인 타임’에서는 시간이 돈이다. 비유가 아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25세가 되면 육체는 더 이상 늙지 않으며 각자 1년의 시간을 받는다. 팔에 남은 시간이 표시되며, 시간이 소진되면 즉각 사망한다. 일한 대가로 시간을 받으며, 시간으로 집세를 내고, 커피와 음식을 구매한다. 구걸할 때도 시간을 달라고 조른다. 거래는 팔을 맞잡고 시간을 이체하며 이뤄진다. 이 세계에서 시간은 앞서 설명한 화폐의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다. 노란 종잇조각인 5만 원 지폐와 달리 화폐가 생명과 연결된 실제 가치를 지닌다.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 분)는 빈민가에서 말 그대로 하루 벌어서, 하루 산다. 물건값을 흥정하는 동안 뒤에서 기다리는 모든 사람의 돈(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에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윌은 예상치 못하게 버스요금이 1시간에서 2시간으로 인상돼 버스를 타지 못한 어머니를 허무하게 잃는다. 이 세계에서 인플레이션은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일이다. 윌은 부잣집 딸인 실비아(어맨다 사이프리드 분)와 함께 실비아 아버지에게서 강탈한 백만 년의 시간을 자선단체로 보내고, 사람들은 이 시간을 나눠 갖는다. 시간이 풍족해지자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공장은 멈춘다. 행복한 결말로 영화는 끝난다. 과연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사람들이 일하지 않아 상품과 서비스의 공급이 극단적으로 줄면, 가격은 극단적으로 올라간다. 화폐의 공급이 늘면서 화폐 가치는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가진 돈은 늘었지만, 그만큼 구매력이 늘지는 않는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왜 문제일까? 상품가격이 오르고 임금도 오르고, 모든 가격이 동시에 오르면 큰 문제가 없는 게 아닐까?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지 못하며 발생하는 초인플레이션의 사례를 보자. 2008년 11월 짐바브웨에서는 물가가 한 달 동안 800억% 올랐다. 1년 전과 비교하면 900해% 올랐다. 9백해는 9 뒤에 0이 22개 있는 숫자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제의 세계’에서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세대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것이 얼마만 한 가치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가격은 제멋대로 올라갔다.’ 초인플레이션에서 화폐는 가치 척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오늘 물가가 어제 물가에 비해 3배가 올랐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40년간 착실하게 저축하고 또 그 돈을 애국적으로 전시 공채에 충당한 사람은 거지가 되었다. 빚을 지고 있던 사람은 그것을 갚았다.’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과거 인플레이션이 낮은 시절의 빚은 실질 가치가 거의 없어진다. 실질적으로 채무자의 빚은 탕감되고 채권자는 돈을 잃는다. ‘수천 년이나 계속된 돈이라는 인습은 사라져 버렸고, 원시적인 물물교환 제도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화폐 가치가 불안정해지면서, 화폐는 교환을 매개하지 못한다. 물물교환 시대에 이발사가 택시를 타려면, 택시 기사의 머리를 손질해줘야 할까? 자국 화폐의 가치를 신뢰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외국 화폐를 이용한다.
초인플레이션은 대부분 국가 재정문제로 발생했다. 부채를 갚기 위해 화폐 발행을 늘리고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부채의 실질 가치를 줄일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가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부채를 중앙은행이 사들인 일이 있고, 그럴 수 있다는 의심이 커지기만 해도 화폐 가치는 하락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막대한 전쟁배상금이 초인플레이션의 주 요인이었다. 영화 ‘에비타’에서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대통령의 아내인 에바 페론(마돈나 분)이 차에서 돈을 뿌린다. 페론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에 기반한 복지정책 확대는 부유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만성적인 고물가와 반복된 국가 부도를 겪는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올해 8월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78.5%였다. 국민은 임금을 받자마자 상품 구매에 대부분을 쓴다. 물가가 더 오르기 전에 물품을 구매해야지만 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의 파운드화 가치 급락도 재정문제와 연결돼 있다. 코로나로 인해 국가채무가 급증한 상황에서 새로 들어선 트러스 정부가 감세안과 대규모 에너지 보조금 지급을 발표함에 따라 영국화폐 가치는 하락했다.
한국도 초인플레이션까지는 아니지만 최근 고물가를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원자재와 곡물의 공급이 줄면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도록 가격이 올랐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고는 있지만,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더욱 가파르게 금리를 인상하면서 환율이 높아졌다. 정부와 한국은행에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문제를 해소하라는 요구가 많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평온을 비는 기도에서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했다. 국제 원자재가격은 우리가 바꿀 수 없기에, 단기간에 인플레이션을 낮추려는 시도는 무모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가격통제는 공급부족으로 이어지며 국민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정부의 재정건전성 강화가 인플레이션 방지에 이바지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화폐 가치가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를 유지할 필요가 있겠으나, 지나치게 가파른 금리 인상이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불안정한 시기에 경제 위기론으로 경제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우리 경제 전반을 균형 있게 살피며 단호하되 의연하게 대처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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