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7년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연령하향 논의대상은 형사미성년자
촉법소년과 형사미성년자 구분해야
소년범죄 관한 사회적 고민 필요
우리 모두는 한때 소년이었다. 개인이 관통해 온 소년 시절은 모두 달랐겠지만 어쨌든 모두는 그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몸속에 간직한 채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어서 사회를 일구고, 또 다음의 소년을 기르고 보호하고 가르치고 북돋아 다음 세대를 잇는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은 누군가의 과거인 동시에 현재이고 미래다. 단절된 어느 한 계층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과 역사의 유구한 흐름 속에 언제라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소년을 모른다. 더군다나 범죄를 저지르는 소년에 대해서라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기껏해야 소년범죄가 우리 가족의 일이 되지 않기를, 내 아이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범죄에 빠지거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이 시기를 무사히 통과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어른들이 안일한 기대에 머무는 사이, 소년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세상의 무수한 것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어떤 소년은 범죄와 만난다. 범죄를 실행할 신체적·기술적 능력을 갖추고, 때로는 치기와 어설픔으로, 때로는 다스리기 어려운 반항과 폭력성으로, 때로는 생존에 대한 간절함으로 범죄를 실현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죄소년이 된다. 범죄소년은 더 이상 귀엽다고 할 수 없는 기세로 타인과 자신을 할퀴고 사회를 뒤흔든다. 소년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인 우리가 무언가 답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근래 '촉법소년'이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린다. 어른 못지않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 버젓이 범죄를 저질러 놓고 '나 촉법인데 어쩔 테냐'고 약을 올리는 소년들의 사례가 언론에 연달아 보도되었다. 저토록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들을 나이가 어리다고 그냥 놔둘 수는 없다는 공분이 일었다. 법무부는 '촉법소년 연령 하향'을 검토한다고 발표하고, 그렇다면 하향할 나이를 몇 살로 할지 여러 의견이 오가고 있다.
아동의 신체 발달과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오랜 세월 그대로 유지해 왔던 형법상 형사미성년자의 연령을 재검토하자는 것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논의다. 반드시 필요하고 어떤 면에서는 반갑기도 하다. 이는 어느 연령부터를 형벌의 관점에서 성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인데, 이 기회에 소년들의 발달 상황과 사회적 구조적 환경에서 소년들이 처한 위치, 우리의 형벌 시스템의 현실과 형벌을 가함으로써 소년의 장래와 사회에 어떤 효과가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 나아가 우리 사회가 형벌을 무엇으로 보고 있으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까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의를 '촉법소년 연령 하향'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는 의도치 않게 논의의 본질을 흐릴 위험성이 있다. 13세인 소년 A가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게 되는 문제는 그가 '촉법소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사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논의의 제목은 '형사미성년자 연령 하향'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오히려 촉법소년이란 형사미성년자인 소년 A에 대해서까지도 손 놓고 있지 말고 무언가 필요한 조치를 해보자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형사처벌의 영역에 포섭되지는 않아 사각지대에 놓인 10세에서 14세 미만의 소년에까지 소년부의 처분 등 필요한 처우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이라는 말은 자칫 '촉법소년'이란 죄를 지어도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는 애들이라는 항간의 오해를 강화한다. 그 결과로 나쁜 제도인 촉법소년의 범위를 줄이면 된다고 쉽사리 생각해 버린다면, 우리는 결국 촉법소년을 미워하게 될 뿐, 형사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년범에 대해 어떤 조치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원래의 고민을 잊어버리게 된다. 모처럼, 소년의 범죄에 대해 어떤 답을 내어놓고자 사회적 관심이 모아지는 이 기회가 단편적으로 지나가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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