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CCTV 52대 확보, 사건 재구성 속도
살인죄 적용 어려워... 과실치사 혐의 검토
'밀치기와 사망' 간 인과성 입증해야 성립
“남녀 네다섯이 ‘밀어라’, 이런 말을 시작했다.”
31일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 생존자 A씨가 한 주장이다. 지난달 29일 참사 당시 인파 뒤편에 있던 5, 6명의 무리가 고의로 앞사람을 밀었고, 그 여파로 사람들이 넘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토끼 머리띠를 한 남성이 “밀어”를 외치며 힘껏 미는 동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경찰은 이를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지 않고 있다. 사고를 유발한 ‘외력설’ 규명에 수사력을 집중하는 모습이다. 전날 475명의 대규모 수사본부를 꾸린 경찰은 사고 현장 인근 폐쇄회로(CC)TV 52대를 확보하고, 목격자와 부상자 44명을 조사하는 등 참사 상황을 재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관련 SNS 영상물도 비중 있게 들여다보는 중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날 합동브리핑에서 ‘토끼 머리띠 남성 신원이 확인됐느냐’는 질문에 “목격자 조사, 영상 분석 등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남성이 현재로선 사고 원인을 가려낼 핵심 인물이다. 문제는 대상을 특정하기도, 범행을 밝혀내기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수천 명이 운집한 인파 속에서 가해자를 콕 집어 책임을 묻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찾더라도 사람을 ‘미는 행위와 압사 간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느슨한 통제로 코너에 몰린 경찰이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 만들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내놓는다.
'토끼띠' 일당 특정? "모래사장서 바늘 찾기"
일단 토끼 머리띠 세력에는 ‘형법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살해의 고의성이 없더라도 앞사람을 밀어 대열이 무너지고 사망(압사)에 이르게 했다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 출신 경찰 관계자는 “살인죄를 적용하려면 고의성이 필요한데 대열 뒤쪽에서 밀친다고 살해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결과를 처벌하는 과실치사가 그나마 적용 가능한 혐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처벌까지는 넘어야 할 산은 한둘이 아니다. 먼저 가해자 특정부터 난제다. 통상 경찰은 CCTV로 인상착의를 확인한 후 대중교통 탑승 및 카드결제 기록 등을 토대로 신원을 특정한다. 그런데 당시 이태원 일대 유동인구가 10만 명이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다. 경찰 관계자조차 “수사력을 어디까지 동원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푸시' 행위와 압사, 인과관계 입증해야
가해자 일당을 못 박아도 문제는 남는다. 과실치사가 성립되려면 ‘의도적으로 사람을 밀어 피해자들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는 ‘미는 행위가 없었다면 피해자들이 정말 압사하지 않았을지’ 같은 각종 합리적 의심을 배척할 만한 ‘물증’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승재형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고 장소는 ‘T자형’ 골목이라 왼쪽, 오른쪽 양쪽에서 동시에 외형력이 가해질 수 있다”면서 “(동영상 속 밀어라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쓰러지게 된) 외형력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경찰이 밝혀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대경 동국대 교수도 “미는 행위가 발생한 시점과 사람들이 쓰러진 시점 간 시차까지 따져봐야 할 정도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가령 인파 속 누군가의 다리가 꼬이거나, 미끄러지면서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졌다면 토끼 머리띠 일당에게 죄를 묻기 어렵다는 의미다.
반면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일반적이라면 모를까 사고 당일처럼 인파가 몰리고, 비탈길이고, 넘어지면 압사할 수 있다고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상황에선 ‘결과적 가중범’으로서 과실치사 적용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특정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걸 넘어 사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안전 시스템 마련에 수사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윤호 동국대 교수는 “경찰은 왜 이런 대형 재난이 일어났는지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반복된 사고를 막기 위한 ‘백서’를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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