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돌잔치하고 외식 즐기던 삶의 공간
수백 명 숨지고 다친 참사 현장으로 변해
충격 강도 심해... 상담 등 적극 지원 필요
“여기서 30년을 살았어요. 늘 드나들던 거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 닷새째인 2일 서울 용산구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공간. 퇴근 후 집으로 향하던 해방촌 주민 전병곤(57)씨가 걸음을 멈췄다. 아들 또래 수백 명이 죽고 다친 거리를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추모공간에 놓인 포스트잇 글귀를 읽던 전씨는 이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흐느꼈다.
폐허로 변한 삶의 터전... 침묵 휩싸인 이태원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에 전 국민이 슬퍼하고 있다. 유족도, 생존자도, 목격자도, 그걸 바라보는 국민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태원을 삶의 터전으로 일군 주민들의 충격 역시 못지않다.
이들에게 참사가 일어난 골목과 인근 거리는 고락을 함께한 ‘벗’과 같았다. 전씨는 해밀톤호텔에서 첫아들 돌잔치를 하고, 주말이면 세계음식거리를 거닐며 가족과 외식을 즐겼다. 그는 “핼러윈도 동네 아이들에겐 그저 해마다 있는 놀이에 불과했다”면서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전쟁터로 변해 버린 상황이 두렵다”고 했다. 한남동 주민 김모(64)씨도 “이태원역 인근이 오전엔 한산해 자주 반려견을 산책시키곤 했는데, 이젠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 갈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연중 활기 넘치던 보금자리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민들도 많다. 40년째 이태원1동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A(74)씨는 “세계 각국의 문화가 섞여 있는 이태원만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며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거리만 걸어도 괜히 울적해지는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참사 반복 노출 지역민, 트라우마 더 심각"
남들과 달리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주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일상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김씨는 당분간 이태원역 반대편인 보광동 쪽으로 산책로를 바꿨다. A씨는 머리가 멍해질 때마다 영어회화책을 베껴 쓰고 있다. 한 50대 공인중개사는 “이태원 거주자들은 대부분 오래 정착한 사람들”이라며 “어지간해선 터전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정부도 주민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실제 전문가들은 참사 현장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은 지역 주민들이 보다 심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겪는다고 경고한다. 익숙한 공간일수록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4일 “거주 공간을 떠나지 않는 한 참사 현장을 계속 마주하게 돼 충격적 기억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 트라우마는 외부 자극이 심할 때 생기는데, 특히 초기에는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나 물건이 심한 자극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이런 우려를 감안해 지역 주민을 트라우마 ‘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찾아가는 심리 지원 서비스’ 등 적극적 지원 노력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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