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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선 지방대, 학생들은 서울로… 10억 장비엔 먼지만 잔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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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선 지방대, 학생들은 서울로… 10억 장비엔 먼지만 잔뜩

입력
2022.11.10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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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지방대]
학술 생태계 '허리'에 위치한 거점 국립대
실력 있는 교수 있고, 연구 성과도 내지만
재정 부족에 멈춘 연구실, 학생들은 '서울로'
지방 사립대는 연구 기능 '언감생심'
"지방대서 노벨상 타는 일본 사례 배워야"

1일 거점 국립대인 전북대 반도체물성연구소 내 MOCVD(유기금속화학기상증착, 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랩 가운데 약 10억 원에 달하는 MOCVD장비가 고장 난 상태로 놓여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1일 거점 국립대인 전북대 반도체물성연구소 내 MOCVD(유기금속화학기상증착, 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랩 가운데 약 10억 원에 달하는 MOCVD장비가 고장 난 상태로 놓여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지난 1일 전북대 반도체물성연구소 1층에 위치한 MOCVD(유기금속화학기상증착·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랩(연구실). 연구실의 핵심 설비는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위에 금속화합물을 입히는 MOCVD장비다. 전기가 안 통하는 웨이퍼가 전기적 특성을 띠게 하는 공정을 담당하는 만큼 청정한 환경이 유지돼야 한다.

멈춰 선 10억 원짜리 반도체 장비

그런데 연구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건 고장 나 먼지가 잔뜩 쌓인 MOCVD장비였다. 장비 상단에 붙어 있는 관리카드엔 '2006년 12월 구입', '취득금액 9억8,000만 원' 등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전북대 관계자는 "고장으로 한 8, 9년 정도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옆엔 2013년 구비한 또 다른 MOCVD장비가 있지만, 개조 작업을 앞두고 있어 사용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1947년 호남 지역 최초로 설립된 거점 국립대인 전북대는 최근 주목받는 반도체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 대학이다. 특히 반도체물성연구소는 전북대의 간판 연구소 중 하나로 1990년 당시 과학기술부로부터 우수연구센터로 지정될 정도로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열악한 정부의 재정 지원 때문에 기자재가 낡고 고장 나 가동이 사실상 중단될 지경에 처한 것이다.

전북대 반도체물성연구소 내 MOCVD(유기금속화학기상증착, 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장비가 고장 난 상태로 놓여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전북대 반도체물성연구소 내 MOCVD(유기금속화학기상증착, 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장비가 고장 난 상태로 놓여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인구 절벽으로 인한 학생 감소와 예산 부족으로 촉발된 지방대의 '소멸위기'가 거점 국립대의 핵심 연구소에까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전북대의 MOCVD 연구실 가동이 사실상 중단된 것은 '비용' 때문이다. 대당 가격이 10억 원에 육박하는 MOCVD장비를 가동하려면 전기, 냉각수 외에 재료인 수소, 암모니아 등 가스의 비용, 클린룸을 유지하기 위한 필터 비용이 들어간다. 대략 따져도 연간 유지비가 최소 1억 원이다. 장비가 고장 났을 때 수리 비용도 100만 원이 넘는데 간단한 고장은 학생들이 직접 고치기도 했다. 전북대 관계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팹(반도체 생산시설)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전북대 반도체물성연구소 내 MOCVD랩에 장비의 잔고장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들이 놓여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전북대 반도체물성연구소 내 MOCVD랩에 장비의 잔고장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들이 놓여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연구소에는 1999년 구입한 일본산 광학현미경 등 20년이 훌쩍 넘은 연구 장비들도 있었다. 이는 전북대만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국립대가 보유한 기자재 총 1조9,310억 원어치 중 10년 넘게 사용해 교체 대상인 기자재는 47.6%에 달한다. 15년을 초과한 기자재는 전체의 26%로, 국립대 기자재 4대 중 1대는 진즉 교체했어야 하는 장비인 셈이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전북대 물리학과의 나노구조제작실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초전도체 소자를 만들어 측정하고 분석하는 게 이 연구실의 기능으로, 반도체의 포토리소그래피, 식각, 박막 증착 공정과 관련 있다. 이곳의 연구장비는 25년 전 연구실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들여온 것들이었다. 노후된 장비 성능으로 원하는 실험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다. 안상민 전북대 물리학과 교수는 "금속증착기의 경우, 소자를 만들 때 코팅의 균일도와 청정도가 핵심인데 원하는 수준을 얻기 어렵다"며 "결국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실험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구실 한편의 전자현미경은 약 20년 된 장비였다. 현미경과 한 몸인 컴퓨터를 작동하니 윈도우98이나 윈도우XP 같은 구형 운영체제로 보이는 바탕화면이 모니터에 떴다. 안 교수는 "최근의 전자현미경보다 퀄리티가 낮다. 정확히 관측할 수 있는 장비를 구하려면 5억 원은 필요한데 연구비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다"며 "정부가 장비에 크게 투자해야 하버드대, 예일대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일 전북대 자연과학대학 나노구조제작실에서 대학원생이 전자현미경을 사용하고 있다. 20년 된 전자현미경과 연결된 컴퓨터는 구형 윈도우 운영체제로 돌아간다. 전주=홍인기 기자

1일 전북대 자연과학대학 나노구조제작실에서 대학원생이 전자현미경을 사용하고 있다. 20년 된 전자현미경과 연결된 컴퓨터는 구형 윈도우 운영체제로 돌아간다. 전주=홍인기 기자


가뜩이나 '인구 절벽'인데...학문 후속 세대 육성 난항

연구 시설보다 더 큰 문제는 인구 유출로 인한 학생 부족으로 학문 후속 세대를 길러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서울 주요 대학 학부를 졸업한 학생은 외국 유학을 떠나고, 지방대 학부 졸업생은 대학원에 진학할 때 서울의 주요 대학으로 옮기는 '연쇄 이동'이 공식처럼 굳어졌다. 아예 중간에 학부를 자퇴하고 수도권 대학으로 이동하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이태규 국민의힘 의원이 전국 9곳의 지방거점국립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신입생 대비 연간 자퇴생 비율은 2016년 10.6%에서 2021년 17.8%로 뛰었다.

대학원생이 적어지면서 지방대학의 연구 기능도 타격을 받고 있다. 2021학년도 전국의 반도체 관련 대학원 학과 278곳 중 지원자가 1명도 없었던 곳이 33곳이나 됐다. 특히 지방대학은 빈자리를 외국인 유학생을 통해 채우려고 애쓰고 있다.

대학원생 감소로 연구 역량이 약화되면, 그만큼 연구비를 따내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생긴다. 안상민 교수는 "물리학과의 경우 교수가 16명인데 대학원생은 20여 명"이라며 "연구비 재원도 그만큼 적다"고 했다. 반도체과학기술학과의 전임 교수진은 11명인데 퇴임을 앞둔 이들도 있어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는 교수는 2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결실 맺은 연구들...실력 안 밀린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지방대학들도 활발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전북대의 허근 반도체과학기술학과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뉴로모픽 컴퓨팅을 위한 강유전체 폴리머 기반 인공 시냅스' 연구로 나노 분야의 학술지인 '나노스케일 호라이즌'이 수여하는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나노융합공학과의 박사과정생인 다슈람 파델씨는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꼽히는 그린수소를 저비용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비(非)귀금속 기반 고효율 수전해 촉매를 개발했고, 연구 성과는 세계적 학술지인 '나노에너지' 최신호에 실렸다.

김태욱 전북대 유연인쇄전자전문대학원 교수는 머리카락 굵기의 광섬유에 반도체 소자를 구현해 내는 신기술을 개발해 지난 8월 '네이처'의 자매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의 '하이라이트 논문'으로 선정됐다. 나노융합공학과의 이중희·김남훈 교수팀은 자연계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유황을 양극 소재로 사용하는 리튬-황 전지의 에너지 밀도를 크게 높이고 수명을 늘린 연구를 세계적 에너지 학술지인 '어드밴스드 에너지 머터리얼'에 게재했다.

"일본은 노벨 과학상 수상자 24명 중 17명이 지방대 출신"

부상돈 전북대 연구처장이 1일 전북대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부상돈 전북대 연구처장이 1일 전북대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주=홍인기 기자

교수들은 학생들이 지방대학을 떠나지 않게 할 획기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안상민 교수는 "서울권 주요 대학의 대학원생보다 연구비에서 나오는 월급도 적다"며 "대학원생에 대한 충분한 인센티브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허근 교수도 "지금은 거점 국립대학에서 학부생을 배출하면 그 학생은 수도권 대학이나 과기부 산하 과학기술 중점대학(한국과학기술원, 광주과학기술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울산과학기술원 등)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며 "등록금이 없고, 병역 특례(한국과학기술원 등의 자연계 박사학위 과정은 전문연구요원으로 근무할 수 있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초과학 학술 생태계의 위기를 도식화한 그림. 지역 사립대부터 기초 학문 학과들이 폐과되면서 지역 거점 국립대의 연구활동도 타격을 입고, 결국 서울대나 한국과학기술원 등 대학에도 학문 후속 세대의 진입이 줄어 과학의 저변이 무너지는 구조를 표현했다. 부상돈 전북대 연구처장 제공

기초과학 학술 생태계의 위기를 도식화한 그림. 지역 사립대부터 기초 학문 학과들이 폐과되면서 지역 거점 국립대의 연구활동도 타격을 입고, 결국 서울대나 한국과학기술원 등 대학에도 학문 후속 세대의 진입이 줄어 과학의 저변이 무너지는 구조를 표현했다. 부상돈 전북대 연구처장 제공

부상돈 전북대 연구처장은 24명의 자국 노벨 과학상 수상자 중 17명을 지방대가 배출한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 처장은 "독일이나 일본은 연구 중심 대학 시스템이 전국에 퍼져 있기 때문에 무너질 수가 없고 지방의 성장 동력이 된다"고 강조했다.

더 열악한 지방 사립대..."교수들도 자녀 대학원 안 보내"

거점 국립대와 비교하면 지방 사립대들은 더욱 상황이 열악하다. 학부생이 크게 줄어들어 대학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라 대학원 이후 과정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대학원에 투자할 재정적인 여유가 생기더라도 기초 학문보다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에 투자하게 된다. 영남 지역의 한 사립대 총장은 "재정적인 여력이 생겨 기초과학 실험실에 지원을 하고 싶어도, 결국 사회복지 같은 특수대학원에 투자를 하게 된다"며 이를 "전략적 선택"이라고 했다. 지방 사립대 석사 이상 학위를 따려는 직장인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대상으로 한 재교육 과정에 투자한다는 설명이다.

충청 지역의 사립대 총장은 "대학원은 주로 산업체 근무자, 공무원들이 '스펙쌓기용'으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령 인구 급감으로 대학 구조조정이 크게 이뤄질 수밖에 없어서 대학원 나온다고 교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우리 교수들도 이공·자연계열 학생들을 기를 쓰고 의대로 보내려고 한다. 학문을 계속하는 연구자로 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방대학의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거점 국립대는 대학원을 살려 '연구 중심 대학' 기능을 하고, 지방 사립대는 학부생을 가르치는 '교육 중심 대학'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호남 지역의 한 사립대 총장은 "우리처럼 학령 인구가 감소하는 일본의 경우 지방 국립대의 학부 인원을 줄이고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개편했다. 그렇게 되면 지방 사립대는 조금 숨통이 트인다"며 "모든 대학을 다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구조조정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해에 대학이 10개, 20개씩 망가지는 문제를 막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 홍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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