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렬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 인터뷰]
세월호 참사 등 국내 재난 현장 두루 거쳐
"사고 원인 못 밝히면 트라우마 치유 안 돼"
"피해 큰 대형 재난일수록 진상규명 절실"
“온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대형 재난일수록 더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
정신과 전문의 이영렬(61) 경북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치료 권위자다.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년 경주 지진, 2017년 포항 지진, 2018년 192명의 사상자를 낸 밀양 세종병원 화재 등 최근 10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대규모 재난 현장엔 늘 그가 있었다.
오랜 시간 여러 사회적 참사를 지켜본 이 센터장에게 15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핼러윈의 비극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유족과 생존자는 물론 한국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준 이 대형 참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그는 9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뜻밖에 ‘진상규명’을 최선의 치료법으로 제시했다.
“사고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당사자들이 트라우마 치료를 받아도 슬픔과 불안감을 떨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트라우마 치료에 뛰어든 시작은 2007년 12월이었다. 국립공주병원장에 막 부임했던 그때 충남 태안 앞바다에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가 터졌다. 공주병원은 보건복지부가 정신질환자 치료를 위해 전국에 설립한 5개 국립병원 중 하나다. 갯벌이 기름에 오염돼 생계가 막막해진 어민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복지부는 이 센터장에게 “당장 태안으로 가 주민들을 살피라”고 지시했다.
이 센터장은 “당시는 트라우마 개념도 생경해 극단적 선택만 막겠다는 생각으로 갔다”면서 “한 사람씩 면담을 하는데 주민들이 의료진이 온 이유를 알게 되자 ‘꺼지라’고 소리쳐 치료는커녕 도망치듯 나와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고민 끝에 기름 범벅이 된 갯벌로 달려가 기름때를 닦기 시작했다. “본격적 치료 전에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들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미리 막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사고가 많았습니다.”
이 센터장은 2019년 4월 경남 진주시에서 일어난 ‘아파트 방화ㆍ흉기난동 살인 사건’도 사회적 참사가 초래한 집단 트라우마의 중요 사례로 꼽는다. 국립부곡병원장으로 현장에 급파된 그는 4개월 동안 아파트 주민 수십 명을 대면 치료했다.
하지만 범인에게 가족 둘을 잃은 유족은 3년이 지난 올 초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센터장은 “사건 발생 전 범인의 난동에 위협을 느낀 주민들이 8번이나 112신고를 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며 “아무리 장시간 치료를 받아도 누구도 정확한 원인을 설명해주지 않으니 국가를 법의 심판대에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명확한 진상규명이 치료 전에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센터장은 부곡병원장을 끝으로 국가 의료기관에서 물러난 뒤 포항 지진 때 파견돼 활동한 인연으로 이곳에서 지진트라우마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태풍 힌남노 당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숨진 7명의 유족과 극적 생환했지만 중학생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트라우마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이태원 참사 후 통합심리지원단을 꾸려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 등을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어요. 그러나 재발방지를 위한 진상규명이 확실하게 마무리돼야 트라우마도 치유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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