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고질인 불법 정치자금 문제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계기로 재조명되고 있다. 검찰이 이 대표의 최측근인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 등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하면서 불법 자금의 성격을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사용된 '대선자금'으로 규정하면서다. 이 대표를 비롯해 민주당은 '정치탄압'이라고 반발하고 있지만, 사실 여부와 별개로 20년 만에 재개된 검찰발 대선자금 수사는 '정치와 돈'이라는 해묵은 문제를 새삼스럽게 부각시켰다.
우리나라에선 1994년 선거공영제의 본격 도입으로 국가가 선거비용을 보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돈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현장의 목소리는 지금껏 적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지역 이권 세력과 정치권 간 유착이 지방선거와 총선, 대선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탓이다. 특히 대선의 경우 당내 경선을 거쳐 최종후보로 선출되면 소속 정당으로부터 정당 지원금을 받아 자금을 해결한다. 문제는 그 이전 경선 과정과 후원금을 모을 수 없는 예비후보 등록 이전 전국 조직 구축 등 사전 정지작업에도 '실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최근 펀딩 모금 등의 정치인 후원 문화가 일반화됐지만, 경쟁이 치열할수록 불법적인 돈이 투입될 여지는 농후하다.
경선 승리 위해 '지역 조직' 선점
지방선거나 총선후보 경선에서 불법 자금을 주고받는 '정치 건달(브로커)'들은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같은 일을 한다. 그들은 그런 돈으로 먹고살지 않나.
과거 대선후보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정치권 인사는 총선과 지방선거, 대선으로 이어지는 불법 경선자금 연결 고리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대선처럼 큰 선거에서는 후보 측이 지역 조직 중 양질의 조직만을 선별해 돈을 내려보낸다"며 "당내 경선에서 투표권을 갖고 있는 대의원과 권리당원(책임당원) 중에는 이들을 조직해내는 정치 브로커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정치 브로커'란 흔히 지역 유지로 일컬어지는 조직책을 이른다. 통상 지역 내 각종 활동을 기반으로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1,000명의 권리당원을 확보해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주자 측과 접촉한다. "우리 조직이 이번 경선에서 당신네 후보를 지지할 테니 돈이나 사업권을 달라"고 하면서다.
경선이 치열한 지역일수록 이들의 몸값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지방선거와 총선의 경우 '경선 승리=당선'인 국민의힘에선 영남, 민주당에선 호남이 그런 지역이다. 지난 6·1 지방선거에서도 광역단체장 기준으로 국민의힘은 영남을, 민주당은 호남을 석권했다.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당내 경선 과정 중 유권자가 가장 많은 수도권에 앞서 열리는 데다 권리당원(책임당원)이 많은 '텃밭'에서의 성적이 전체 경선 판도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선주자들이 텃밭에서 권리당원 확보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다만 권리당원 확보에는 당원들의 후보에 대한 지지나 충성도에 기대기보다는 조직 동원력을 갖고 있는 브로커의 도움을 빌리는 편이 보다 확실하다.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선 최소한 밥값이나 교통비 정도의 실탄(돈)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은 암묵적인 사실이다. 지난 3·9 대선에서 한 후보의 경선캠프에 참여했던 한 의원도 "FM(원칙)대로 자금을 운용하면 조직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불법 자금 어떤 명목으로 사용하나
막상 경선이 시작되면 의외로 많은 돈이 들지 않을 수 있다. 누가 이길지 판가름 날 때면 지역 조직들도 이기는 쪽으로 알아서 붙기 때문이다. 돈은 오히려 경선 전 권리당원을 확보할 때 더 필요하다.
과거 지방선거와 총선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보좌진의 말이다. 경선 당선을 위해선 투표권을 가진 당원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남들보다 일찍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입당 후 3개월, 민주당은 6개월 이상 당비를 납부해야 경선에 투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당원 가입 독려까지 감안한다면, 경선 돌입 1년 전에는 자체적인 선거체제에 돌입해야 한다. 정치 브로커가 선거판에서 활개를 치는 때도 이 시기라는 얘기다.
이들에게 투입되는 자금은 '조직 관리비'라는 명목이다. 후보 측과 현금이 오가기도 하지만 식사비를 대신 지불하거나 사무실을 무상 대여해주는 형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한 의원 보좌진은 "지역 조직과 식사를 하는 도중에 '인사시키겠다'며 캠프 내 '특보'나 '실장'이란 분을 부르면, 그들이 자연스럽게 밥값을 지불한다"고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선거에 활용하는 시대가 되면서 변종도 등장했다. 대선캠프에서 활동한 한 정치권 인사는 "수십 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접근해 '1년에 5,000만~8,000만 원, 혹은 한 달에 500만 원을 주면 후보 지지 영상을 만들겠다'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현행법상 이러한 돈을 후원금으로 비용 처리하기 어려운 구조다. 공직선거법·정치자금법상 후원금의 용처에 선거판에서 '조직 활동비'라고 불리는 항목이 없기 때문이다.
이권 노린 錢主들의 '보험 들기'
정치 브로커가 후보 측으로부터 돈을 받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주(錢主)로 불리는 지역 기업이나 유지 측의 돈을 받아 활동비로 사용한 대가로 당선자에게 이권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 달에 50만 원씩 줄 사람을 200명 만들어서 돈을 계속 주면 경선에서 이길 수 있다. 내가 A사에서 돈을 받아 선거운동에 사용할 테니, 당선된 후 건설 사업권을 보장하라.
지난 8월 전주지법은 2021년 5~10월 전주시장 예비후보였던 이중선 전 청와대 행정관에게 불법 경선자금을 건네려 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한 시민단체 대표 B씨와 지역지 기자 C씨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인연이 있는 지역 내 건설업체들에 불법 정치자금을 받고 이를 이 전 행정관에게 주려고 했다. 이 전 행정관은 지난 4월 기자회견을 열고 브로커 실태를 고발했다.
지역 건설업체나 유지들이 자금을 대며 경선에 개입하는 것은 후보가 당선 후에 이권을 보장받기 위한 '보험을 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 지방 출신 의원은 "지역 기반이 빈약한 정치 신인들은 검은돈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데, 한 번 발을 들이면 정치 인생 내내 브로커에게 코가 꿰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브로커와 정치인 간 유착관계가 일회성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 6·1 지방선거에 출마를 준비했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지차체장 경선에서 승리하려면 통상 20억 원 정도 든다고들 한다"며 "후보 혼자서 그만한 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브로커를 통해 돈 많은 이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고, 나중에 이들에게 각종 이권을 챙겨줘야 하는 일이 반복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돈 없이 정치할 수 없고 자기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도 없다'는 경우가 지금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20년 만에 이뤄진 것에서 보듯, 경선자금 규모가 가장 큰 대선에서는 어두운 돈의 출처나 흐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불법 경선자금'
캠프 내부에서도 불법 자금의 규모를 알지 못한다. 그런 돈이 있다 해도 후보 최측근만 알거나 후보 본인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 돈 문제를 일절 보고받지 않기도 한다.
지난 총선에서 경선캠프 활동을 했던 한 보좌진은 '실제 경선자금 규모는 얼마 정도인가'라는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불법적인 자금이 있다는 건 알지만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말이다. '후보는 몰랐다'는 식의 최후 방어선을 캠프 내부에서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대표 주변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 보듯, 불법 자금과 관련한 수사는 후보가 불법 자금 모금을 지시했는지, 사전에 불법 자금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가 최대 쟁점이다. 검찰 출신의 한 정치인은 "후보가 불법 자금의 존재를 사후에 알았다는 정도로만 방어할 수 있으면 처벌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증거를 찾는 게 쉽지 않다. 지난 2018년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당선 무효형을 받은 권석창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의 경우, 검찰은 기소 당시 불법 자금 규모를 1,500만 원이라고 주장했고, 법원은 이 중 500만 원만 인정했다. 당시 1,000만 원에 대한 혐의의 근거는 증언뿐이었는데, 법원으로부터 신빙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모금한도 상향·적발 시 일벌백계... 해결책은 없나
정치권 인사들은 경선 과정에서 투입되는 불법 자금을 일종의 '관행'이라고 했다. 또 법과 제도가 크게 바뀌지 않는 한 불법 자금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일각에선 정당이 경선자금을 일부 보전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득표율 15%만 넘기면 선거비용을 전액 보전받을 수 있는 본선과 달리, 경선은 법적 보전 대상에서 제외돼 있기 때문이다.
경선후보가 후원회를 만들어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지만, 액수는 전체 선거비용에 비해 제한적이다. 지난 대선에선 후보자가 사용할 수 있는 총선거비용이 513억900만 원이었으나, 경선후보 후원회는 이 중 5%에 해당하는 25억6,545만 원을 모금할 수 있었다. 정치권에서 합법적인 자금을 무제한으로 모금할 수 있는 미국의 '슈퍼팩'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음지에서 지출되고 있는 불법 자금을 양지로 끌어내자는 취지다. 그러나 정치자금의 제한을 없앨 경우 '유전당선 무전낙선(有錢當選 無錢落選)' 현상이 뚜렷해질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법과 제도, 정치문화가 한데 엮여 뾰족한 해법이 없는 문제"라면서도 "합법적인 경선자금 규모를 늘리는 것도 쟁점이지만, 유력 후보자에게 돈이 과도하게 쏠릴 수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04년 일명 오세훈법(기업의 정당 후원 금지 등) 시행 이후 정치자금 문제가 상당히 투명해졌지만 이후 20년 가까이 지난 탓에 현실과 동떨어진 면도 있다"며 "합법적인 자금 한도를 상향하되, 투명하게 공개하고 위반 시 보다 강하게 처벌하는 식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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