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 생계 등 저마다 꿈 안고 한국에 정착
예기치 못한 참사에 '타지'서 버팀목 잃어
고인 빈자리 크지만 "이겨내고 일상으로"
“원래 형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어요. 아버지가 ‘안전한 나라’로 가라고 해서 한국에 온 건데…”
10일 인천 연수구 인천대 송도캠퍼스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압보스백(23)씨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지난달 29일 ‘이태원 참사’로 이 학교 동북아국제통상학부에서 함께 공부하던 맏형 무하마드라우프(26)씨를 잃었다. 내년 2월 졸업을 세 달 앞둔 형은 끝내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이태원 참사는 ‘안전 사회’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저버렸다. 희생자 157명 중에는 외국인도 26명 있다. 잘 사는 나라 한국, 그것도 수도 한복판에서 참극이 발생한 사실을 이들 유족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사전 대책, 수습 모두 엉망... 책임 물어야"
치안이 불안한 중앙아시아권 학생들에게 한국은 유학지로 인기가 높다. 총기 소지도 불허하고, 밤에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범죄의 타깃이 될 확률이 낮다. 압보스백씨의 아버지가 한국행을 권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8년 형이 먼저 한국에 왔고, 올해 동생이 합류했다. 그러나 2주 전 참사는 ‘한국=안전 국가’ 공식을 무너뜨렸다. 압보스백씨는 “한 번에 150명 넘게 숨진 결과 자체가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촌동생 옥사나(25)씨를 떠나 보낸 러시아 출신 고려인 오리아나(29)씨도 한국 사회의 ‘안전 불감증’이 원망스럽다. 그는 “한국 정부가 거리두기 해제 후 첫 핼러윈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하지 못한 책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무슨 이유로 현장 조치가 이렇게 지체됐는지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설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외국인 유족들을 괴롭히는 건 또 있다. 가족을 잃은 것도 슬픈데, 사고 수습 과정 전반은 그야말로 난관투성이었다. 한국말이 서툴러 가족 생사를 확인하는 일부터 험난했지만, 한국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은 없었다.
오리아나씨는 참사 당일 오후 11시 45분쯤 연락해 온 사촌동생 친구와 함께 이튿날 오전 5시까지 병원이란 병원은 다 뒤졌다. 서울 한남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실종자 접수센터의 존재도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기자에게 들었다. 그는 “실종자 접수부터 하라는 기자의 조언이 없었다면 접수센터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압보스백씨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밤새 형 친구들과 형을 찾아 헤맸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다가 다음 날 오전 9시에서야 경찰로부터 사망 소식을 들었다.
가족 가슴에 묻고 다시 한국으로
일상 복귀가 힘든 것은 외국인 유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러시아에서 동생 장례를 치렀지만, 오리아나씨는 여전히 공허함에 시달린다. 그는 “내 인생의 햇살 같은 존재였던 동생이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죄책감을 평생 씻을 수 없을 것”이라며 눈물을 쏟았다.
형 이름만 나와도 울먹이려 했던 압보스백씨는 기자에게 휴대폰에 저장된 짧은 영상 한 편을 내보였다. 영상에서 고인은 올해 8월 친구들과 강원도 해변에 놀러가 백사장에다 손 글씨로 ‘LIFE’라고 썼다.
“형은 삶에 대한 의지가 참 강한 사람이었어요. 이 영상처럼요. 먼 길을 떠난 형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에서 계속 공부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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