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ASF 동시 유행 가능성 점차 높아져
가축방역관 부족·R&D 예타에서 탈락
컨트롤타워 없어 '반짝 방역 정책' 집중
연례행사가 돼 버린 가축전염병이 또다시 전국을 집어삼키고 있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대유행 우려가 커진 가운데 아프리카돼지열병(ASF)까지 발생해 가축 방역에 초비상이 걸렸다. 철새·야생 멧돼지에 의한 전파가 1차 원인이지만 졸속 행정과 인력 부족, 컨트롤타워 부재 등이 매번 반복되는 가축전염병 피해를 키운다는 지적이다.
허울만 방역…현장선 눈 가리고 아웅
지난달 19일 경북 예천군 종오리농가가 올가을 처음 확진된 이후 AI는 충북·충남·전북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달 13일까지 벌써 12곳의 가금농장이 AI 양성 판정을 받았다.
앞서 9일에는 강원 철원군 돼지농장에서 ASF도 나왔다. 지난달 28일 경기 김포시 확진 발생에 이어 40여 일 만이다. 충북 충주·단양과 경북 영주·문경 등에서 ASF에 감염된 야생 멧돼지 사체가 계속 발견돼 추가 확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재홍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AI·ASF가 동시에 유행한 2019년 사태가 재발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선 농가의 낮은 방역 인식이 가축전염병 확산에 한몫하고 있지만, 정부·지방자치단체(지자체)의 엉성한 대응이 피해를 키운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울타리 등 주요 방역시설이 가축농장에 잘 설치됐는지 살피는 방역시설 점검 조사만 해도 엉터리라는 게 현장 전문가의 토로다. 대한공중방역수의사협회 관계자는 “지자체 방역 담당 공무원이 직접 조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농장주에게 정비된 방역시설이 잘 나온 사진을 보내 달라고 전화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방역시설 점검이 제대로 이뤄진다고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수년간 정부가 추진해 온 방역정책은 ‘탁상행정’에 그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ASF에 감염된 야생 멧돼지의 이동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약 2,800㎞ 길이의 광역 울타리가 대표적이다. ASF 확산 차단에 성과를 거둔 독일·체코에서 시행한 이 대책을 2019년 들여오면서 정부는 1,700억 원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올해 1월 광역 울타리 이남에 위치한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서 ASF 감염 멧돼지가 연달아 발견되는 등 실효성에 문제가 되자, 결국 올해 해당 사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조영광 공중방역수의사는 “평야 지대인 유럽과 달리 한국은 산악 지형이 많고 도로에는 울타리를 설치할 수 없어 애초부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국 양돈농가에 배포한 ‘농장 4단계 소독 요령’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1단계 소독 조치로 농장 주변에 생석회 도포를 주문했다. 농장 진입로에 생석회를 뿌려 바이러스 유입을 막자는 취지다. 그러나 조 공중방역수의사는 “비·눈이 오면 생석회가 녹아 효과가 사라진다”며 “전형적인 보여주기 행정”이라고 꼬집었다.
가축전염병 R&D는 예타 문턱에서 좌절
부족한 가축전염병 대응 인력은 엉성한 방역망의 구멍을 더욱 키우는 요인이다. 전국 지자체의 가축방역관은 2,018명이 적정 인원이지만 현재는 약 63%인 1,270명(올해 8월 기준)만 근무 중이다.
지역별로 보면 경북(140명)·강원(112명)·전북(91명) 등 가축을 많이 기르는 지역일수록 가축방역관이 부족하다. 업무 부담에 따른 수의사 기피 현상과 지자체 예산 부족으로 가축방역관 미충원율은 2018년 22.9%에서 올해 37.0%까지 치솟았다. 앞으로도 가축전염병 현장 대응이 개선되리라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가축전염병 연구개발(R&D) 같은 중장기 대책보다 당장 급한 불을 끄는 데 초점을 맞춘 정부 정책도 되풀이되는 가축전염병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실제 농식품부에서 유일하게 진행하던 가축전염병 R&D이자, 지난해 종료된 ‘가축전염병 대응사업’의 후속 연구과제는 올해 초 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탈락했다. 경제 편익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정부는 2012년부터 927억 원을 들여 가축전염병 대응사업 명목으로 가축전염병 예측 모델과 진단 방법, 백신 등을 연구해 왔다.
조호성 전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주무부처가 다르긴 하지만 야생 멧돼지 울타리 설치(환경부)엔 2년여 만에 1,700억 원을 쓰면서 가축전염병 중장기 대책의 바탕이 될 관련 R&D엔 1년에 100억 원도 쓰기를 주저하는 게 정부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가축방역청 설립 검토해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단기 대책이 가축전염병 방역의 주를 이루는 건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가 없어서다. 그렇다 보니 ‘반짝 효과’를 볼 수 있는 단기 처방에 집중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가축전염병 사태가 해마다 반복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코로나19 사태를 진두지휘한 질병관리청처럼 가축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가축방역청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조 교수는 “야생동물로 인한 가축질병이 점차 문제가 될 텐데 현재 야생동물 전염병은 환경부, 가축전염병은 농식품부가 담당해 정부 안에서도 엇박자가 날 수 있는 상황”이라며 “단일 기관 소속으로 예산·인력이 집중되면 관련 방역체계를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축방역청 설립이 당장 어렵다면 농식품부의 방역정책국과 검역본부 간의 기능을 이원화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현재는 행정 관료집단인 농식품부에서 가축방역정책을 총괄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검역본부가 가축방역을 전담하고 농식품부는 행정 지원하는 식으로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가축방역관 처우 개선 등 방역 역량 강화를 위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며 “중앙 조직을 키우기보다 농식품부와 검역본부, 지자체가 각자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는 게 우선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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