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해야 한다면 저 혼자서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른이잖아요. 아버지가 매번 이렇게 제 삶에 끼어들어서 좌절까지도 대신 막아주는 거 싫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
#"나는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 중)
드라마, 영화를 '보는' 대신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대본과 각본을 영상화를 위한 도구로 취급했다면, 이제는 그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여기게 된 결과다. 관련 서적 출간도 늘어나는 추세다. 15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대본집(각본집) 출간은 2020년 총 22종에서 올해 총 41종으로 2년 만에 2배가량 껑충 뛰었다.
'헤어질 결심' 8만부, '그 해 우리는' 10만부 돌파
이 중 올해 최대 히트작은 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집과 드라마 '그 해 우리는' 대본집이다. 각 출판사에 따르면 '헤어질 결심' 각본집은 8만 부, '그 해 우리는' 대본집은 1, 2권을 합해 10만 부가 팔렸다. 1쇄를 보통 1,500~3,000부 찍고, 이조차 다 소진되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기를 짐작하게 하는 판매량이다.
책을 샀더라도 한 번 읽고 중고 시장에 바로 내다파는 독자가 적지 않은데 대본집을 사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는 건 왜일까. 김민경 김영사 편집자는 "방송은 휘발되는 경향이 있지만 책은 소장하고 간직할 수 있는 물성이 있다"며 "CD를 여러 장 사며 아이돌을 덕질하듯이 대본집 구매를 드라마 덕질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출판사들이 대본집을 출간하며 굿즈에 신경 쓰는 것도 그래서다. '그 해 우리는' 대본집은 드라마 주인공 '국연수'와 '최웅'의 명찰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대본집은 극중 로펌 '한바다' 직원들의 명함 세트를 굿즈로 내놓았다.
'미스터 선샤인', '헤어질 결심', '기생충'의 대본집을 소장하고 있는 최병건(22)씨는 "잘 쓰인 대사가 주는 쾌감이 있다"며 "발화돼 사라지는 음성이 아니라 문자로 남아 있어 전체적인 대사의 설계를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이라고 말했다.
배우의 연기, 감독의 연출이 더해진 최종 작업물과 대본집을 비교해 보는 건 또 다른 재미다. 위다혜 교보문고 예술 MD는 "구매층을 살펴보면 20, 30대 여성이 압도적"이라며 "영상에서 삭제된 장면과 대사, 지문을 각본집에서 보면서 작품 분석을 하려는 수요가 많다"고 말했다. 대학생 유예진(23)씨도 "영화에 없는 장면이 있어 인물에 대해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대본집의 묘미"라며 "내가 대사의 호흡을 조절하며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좋다"고 말했다.
대본집이 침체된 출판 시장에 돌파구가 되면서 갈수록 출간을 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김민경 편집자는 "'그 해 우리는'은 10군데가 넘는 출판사가 입찰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올여름 신드롬을 일으킨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진작부터 출판 시장의 '대어'로 꼽히면서 출간 제안이 쏟아졌다는 후문이다.
대본과 각본, 영상화의 도구 아닌 독립된 작품
국내 첫 대본집은 출판사 북로그컴퍼니의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대본집이 출간된 2009년만 해도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노희경 작가조차 출판사 대표의 제안에 "누가 대본집을 돈 주고 사냐"며 "망한다"고 말렸을 정도다. 김정민 북로그컴퍼니 대표는 "노희경 작가님의 대본은 어느 문학 작품에 견주어도 읽는 맛, 인간 탐구에 대한 깊이가 있다고 생각해 일반 독자에게도 소구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출간 계기를 밝혔다.
대본이 출간으로 이어지는 핵심 기준은 이처럼 활자화됐을 때의 소장 가치다. 유명 배우의 출연 또는 시청률(관객수)이나 최신작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상반기 "날 추앙해요"라는 명대사를 유행시킨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나의 아저씨'는 종영 뒤 4년 만에 출간됐는데도 올해 대본집(극본집) 판매량 4위(예스24 기준)에 올랐다. 대본집이 출간된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최고 시청률은 5.7%, '그 해 우리는'도 5.3%에 불과했다.
강유정 강남대 글로벌문화학부 교수는 "대본집이나 각본집 출간은 조급한 쪽대본 시스템에서 벗어나 대본의 독립적 완성도를 인정할 수 있는 작품들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대본에 대한 소비는 대중이 대본이나 시나리오가 부속품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행위"라며 "한국의 콘텐츠 산업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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