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월드컵은 '정치'다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6:2라는 점수를 축구에서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아마 4:0이나 5:0보다 더 희귀한 결과일 것이다. 이번 월드컵 이전에 단 한번 본 적이 있다. 때는 1996년,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이란과 맞붙은 대한민국의 경기였다. 우리가 이긴 게 아니고 졌다. 그것도 한 선수(알리 다에이)에게 네 골이나 헌납하면서 6:2로 진 것이다. 이때부터 이란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아시안컵이나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유독 자주 매치업됐고 대체로 접전을 펼쳤으나 결과적으로 우리가 더 많이 졌다. (역대 전적 9승 10무 13패) 이번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우리나라는 이란과 한 조로 편성됐다. 그들의 홈인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이긴 적이 없고,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아픈 추억(이란 감독 케이로스는 울산 원정 승리 후에 대한민국 코칭 스태프를 향해 ‘주먹감자’를 날리는 비신사적 행위를 했다)까지 있어 심히 걱정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벤투호는 테헤란 원정에서 우세 끝에 무승부를 거뒀고 홈에서 2:0으로 이란을 제압했다. 이때가 벤투 감독의 인기가 높게 치솟은 잠깐의 순간이기도 하다.
초반 늪에 빠진 이란
이란과 잉글랜드의 경기 결과가 6:2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잉글랜드가 이길 확률이야 높았겠지만, 이란에 꽤 고전할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 높아 보였다. 이란은 강인한 정신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수비로 상대방의 계획을 흩트리고, 선취골을 넣거나 동점으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할 때는 이른바 ‘침대 축구’를 시전하며 상대를 곤혹스럽게 한다. 일명 ‘늪 축구’의 달인인 이란은 2018년 월드컵에서 1승 1무 1패로 선전했으나 아쉽게 16강에 진출하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뻔도 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맞이한 이란은 그때의 이란과 완전히 다른 팀이었다. 이란은 잉글랜드의 정확한 횡패스와 공간 침투를 제어하지 못했고, 골키퍼가 부상으로 교체된 후에는 멘털리티 측면에서도 약점을 노출했다. 그날의 이란은 분명 우리가 알던 이란이 아니었다.
제창 거부 '몰랐던 이란'
국가 연주에서부터 경기는 시작한다. 이날 이란 선수들은 자신들이 대표로 나선 국가가 연주될 때 제창을 거부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는 히잡 거부 운동에서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대정부 투쟁을 지지한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들이 국가와 시민을 대표하러 월드컵에 나선 것이지 정부의 통치자를 대리하는 게 아니라는 상징이자 증거이기도 했다. 사실 이란 대표팀은 대회 전부터 시위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라는 시민들의 압박을 받았다. 동시에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에도 시달렸다. 정부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낸 사르다르 아즈문은 유럽파 공격수이자 팀의 에이스임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에서 탈락시킬 것을 종용받았다. 경기 중에 이란 팬들은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가 된 축구 레전드 알리 카리미의 이름을 연호했다.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여성을 포함한 많은 이란 팬의 손에는 이러한 문구가 영어로 적혀 있었다. “우먼(women), 일상(life), 자유(freedom).” 요컨대 그날의 축구장은 이란 역사에서도 세계 정치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장면이 된 것이다.
같은 경기에서는 다른 정치도 벌어졌다. 카타르 월드컵은 비리의 온상이 된 유치 과정은 물론 경기장 등 기반 시설을 건설하며 발생한 노동자들의 잇따른 사망과 여성, 성소수자에 대란 반인권적 탄압으로 이미 얼룩졌다. 거대한 경기장을 에어컨 바람으로 채워버리는 과감함은 탄소 중립 월드컵이라는 말을 하나의 사기극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세계에서 온 축구 팬들에게 맥주를 금지하고 여성의 복장을 단속하는 행태는 그나마 해프닝으로 느껴질 정도다.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의 몇몇 참가국은 카타르의 성소수자 인권 탄압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뜻으로 무지개 완장을 차려는 계획이 있었다. 벌금이 부과되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규정 외 완장을 찬 선수에게 옐로카드를 주겠다는 국제축구연맹(FIFA·피파)의 강력한 입장에 결국 무지개 완장을 포기하고 만다. 피파는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축구와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구호의 성격을 띤다는 이유로 제재를 가하고 있다. 카타르와 대회 조직위원회는 선수뿐만 아니라 경기장에 찾아오는 팬에게까지 무지개색 응원 도구와 모자, 스카프 등을 금지했다. 그저 그것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월드컵, 정치의 역사
무엇이 정치적인가. 정치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반대로 비정치적인 월드컵은 가능한가. 월드컵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대회였다. 지난 러시아 월드컵이 푸틴 체제에서 서방에 맞서며 동시에 서방을 닮아가려는 러시아의 선전 도구였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일본과의 유치 경쟁이나 유치 이후 대표팀의 성적 경쟁도 이웃 일본과의 라이벌 관계가 작용한 정치적 결과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조별리그에서 사우디에 역전패당해 세계에 충격을 안긴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열린 1978년 월드컵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의 비호 아래 극심한 편파 판정이 일어났고 결국 아르헨티나가 우승컵을 들었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발을 월드컵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려고 한 것이다. 반대로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은 정치적으로 스페인에 아주 중요한 대회였다. 프랑코의 오랜 독재 체제를 청산하고 유치하는 첫 국제대회였기 때문이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의 우승은 통일 독일이라는 정치적 환희를 스포츠로 연장했다고 할 만했다.
축구는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월드컵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피파는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역사가 없고 축구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유럽과 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카타르를 개최국으로 선정함으로써 월드컵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돈만 있다면) 개최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을 이미 완료했다. 개최국 선정 과정에서 의혹이 제기된 심대한 부정부패 스캔들이 사실로 밝혀졌음에도 대회를 그대로 강행함으로써 권위주의 국가와의 끈끈한 결탁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무엇보다 성소수자를 배척하고 여성 인권을 억압하며 외국인 노동자의 생명을 경시하는 카타르 월드컵의 난맥상을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렇게 해도 괜찮다” 선언하고 있다. 그것도 고도로 정치적인 방식으로. 반대로 거대한 악의와 혐오에 저항하는 작은 몸짓마저도 정치적이라는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을 동원해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정치적인 단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외면받은 외국인 노동자와 여성도 관객
우리 사회에 거의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첨예한 문제일수록 정치의 공간은 넓어진다. 피파는 그런 복잡한 문제는 잊고 이 순간만큼은 콜라를 마시며 축구나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공식 후원업체의 광고를 보며 세계적인 스타의 플레이를 즐기며 가끔 발생하는 이변에 감동하며 그렇게 축구 자체를 즐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축구를 즐기는 사람 중에서 반은 여자일 테고 또 상당수는 동성애자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카타르에서 죽은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일 것이다. 그들에게 카타르 월드컵이 비정치적으로 존재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것에 대해 축구장에서 표현하는 행위는 당연히 정치적이지만, 피파 측엔 이런 정치는 금지해야 할 일이다. 월드컵이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어떤 정치는 괜찮지만 어떤 정치는 나쁘다.
잠깐,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언론의 마땅한 비판이나 시민사회의 견제를 정치적이라 평하고 깔아뭉개는 모습과 반대로 자신의 말실수나 옹고집은 정치가 아닌 국가 대의를 위한 그 무엇이라 우기는 행태. 가끔 이런 것들이 손흥민의 부상보다 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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