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OTT 시리즈 '약한 영웅' 화제의 주역 홍경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성소수자 시인, 군 가혹행위 상병 등 맡아... "연대 위해 더 많은 타인 발견했으면"
편집자주
훗날 박수소리가 부쩍 늘어 문화계를 풍성하게 할 특별한 '아웃사이더'를 조명합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범석은 학교에서 샌드백 취급을 받는다. 같은 반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다시 괴롭힘이다. 우여곡절 끝에 친구를 얻고 '왕따'의 고리를 끊어갈 때 범석은 가해자로 돌변한다. 또래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처세술이자 오랫동안 짓밟혔던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택한 방법이다.
배우 홍경(26)은 최근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OTT 웨이브 시리즈 '약한 영웅 클래스1'에서 위태로운 주인공 범석의 두 얼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범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친구를 압박하지만 그의 말엔 떨림이 가득하다. 범석뿐 아니라 폭력에 오랫동안 물든 학교와 군대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직, 간접적으로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그 긴 시간을 뒤틀린 채 지나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약한영웅'에서 시은(박지훈)은 믿음을 저버린 친구 범석을 끝내 때리지 못한다. 범석의 성장통에 시청자들이 몰입하는 이유다.
홍경은 앞서 넷플릭스 시리즈 'D.P.'(2021)에서 병장에게 당한 가혹행위를 후임 조석봉(조현철)에게 반복하는 상병 류이경을 연기했다. 그런 홍경은 군대와 학교를 오가며 내리 물림된 사회의 폭력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배우다. "우리의 살결과 닿아 있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서로 살아온 과정과 환경은 다르지만 우리가 같이 느낄 수 있는 연대 의식이라는 게 있잖아요. 분열과 혐오가 심해지는 시대엔 타인을 바라보는 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2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본보와 만난 홍경의 말이다.
고1인 범석을 연기하기 위해 홍경은 올봄 서울 강남과 마포 일대에 몰려 있는 입시 학원가를 찾았다. 요즘 학생들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어서였다. "배역과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는 마음으로 촬영한다는 그는 영화 '결백'(2020)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역을, '정말 먼 곳'(2021)에서 성소수자 시인 역을 맡았다.
2017년 드라마 '추리의 여왕'으로 데뷔해 올해로 5년 차. 신인 배우의 활동 기간은 짧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다채롭다. 청년 배우는 작품을 통해 몰랐던 세상과 사람을 배운다. 홍경은 "사람이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이라며 "'이해를 하는 게 아니라 발견을 하는 거다'란 말이 있는데 그렇게 발견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찍는다"고 했다. 그가 뒤늦게 발견해 요즘 푹 빠진 것은 한강이 20대에 쓴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1995)이다. 홍경은 "비극적이고 처절한 현실 속 온정이 깃든 이야기에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혜수 김고은 주연의 '차이나타운'(2015)으로 유명한 한준희 감독은 'D.P.'에서 함께 작업한 홍경을 '약한영웅' 범석 역에 추천했다. 그는 김은희 작가의 차기작이자 내년 K콘텐츠 시장 기대작인 '악귀'에서 형사 역으로도 캐스팅됐다. 고2때부터 직접 영상을 찍어 여러 오디션의 문을 두드린 소년은 이른 나이에 꿈에 성큼 다가갔지만 그는 고요해 보였다. 되레 "매번 온 마음을 쏟아 새롭게 작품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며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를 조심스럽게 고민했다. 한 시간여의 인터뷰가 끝난 뒤 홍경은 두 손을 내밀며 인사를 권했다. 따뜻한 그의 손은 땀에 젖어 있었다. '약한영웅' 범석이 서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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