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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새로운 얼굴의 예술, 과학·공학·디자인과 '경계 ' 사라지다

입력
2022.11.29 05: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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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술, 손재주가 아닌 융복합 학문으로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미국 MIT 미디어랩은 디자인과 공학이 만나는 융합 세계에서 가장 핫한 연구소다. 멀티미디어 개념을 처음 제시한 네그로폰테, 그리고 인공지능(AI)의 창시자로 불리는 민스키 등이 1985년에 설립하여 곧 4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지만, 이 연구소에 쏠리는 관심과 자본은 2000년 이후 급격히 늘었다. MIT 미디어랩의 기본 철학은 미디어 예술과 과학의 융합에 있고, 현재까지 세계의 유명 다국적 기업과 단체들의 막대한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삼성도 MIT 미디어랩에 매년 60억 원에 가까운 후원금을 내고 여기에 직원 한 명을 보내고 있다. 그 직원은 미디어랩에서 이뤄지는 모든 연구들을 '관람, 시청, 작동'하면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삼성처럼 직원 한 명을 보내기 위해 세계의 글로벌 기업들이 후원금을 내고 있다. MIT 미디어랩 출신이란 점은 그 자체로 막강한 스펙이 되어 어디든 골라 갈 수 있을 정도로, 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발전소다. 그 이유와 힘은 무엇일까?


미국 보스턴 MIT 미디어랩. 인터넷 캡처

미국 보스턴 MIT 미디어랩. 인터넷 캡처


서울대 정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대 정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위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미술대학 입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지난 17일, 2023년도 수학능력고사가 끝나고 연일 대입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는 요즘이다. 예술중학교, 예술고등학교의 입시가 있는 가을부터 연말까지 미술 전공에 대한 학부모들의 문의가 가장 많은 때다. 그중에는 "우리 아이가 그림을 제법 잘 그리는데 성적은 좀 낮아요. 이러면 미대 가는 게 좋겠죠?"라는 질문이 많다. 그만큼 40대 이상 연령의 성인들에게 미술은 아직까지 '손재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방증이다. 당연했던 인식이고 쉽게 바뀌지 않는 선입견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자녀의 미대 진학 또는 미술 전공과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바로 되묻는 질문이 있다. "아이가 디자인 분야를 생각하나요, 아니면 순수예술 분야 작가를 꿈꾸나요?" 일반 대중에게 미술의 전공 구분은 그 경계가 선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대 입시의 시작은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야 현재의 미대 입시를 준비할 수 있고, 종국에는 들끓는 예술 분야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 디자인 분야는 전통적인 순수미술 전공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전국의 미술대학 전체에서 응용미술 전공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화, 동양화, 조소와 같은 순수미술 학과의 정원은 줄어드는 추세에 있고, 여러 대학에서 통폐합 또는 사라진 경우도 있다. 현재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10명 중 7명 정도는 디자인, 애니메이션 등 응용미술 분야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10월 20일 킨텍스에서 실시된 중부대학교 실기고사 현장. 중부대 제공

지난 10월 20일 킨텍스에서 실시된 중부대학교 실기고사 현장. 중부대 제공


2020년 건국대 실기고사 채점 현장. 연합뉴스

2020년 건국대 실기고사 채점 현장. 연합뉴스


미대 입시 변화…서울대는 수학 챙기고, 홍익대는 실기고사 폐지

서울대와 홍익대 미대 입시 변화를 보면 예술 분야의 최신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혹자는 왜 서울대 홍익대 이야기냐고, 왜 엘리트주의적 예술 이야기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 보스턴에 있는 MIT 미디어랩에, 그러니까 미국 최고 대학이라는 MIT의 미술융합 대학원에 수천억의 연구비가 쏟아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반박해야 할 것이다. 넉넉한 연구지원은 결국 힘이 된다. 이 맥락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며, 국내 최상위 미술대학의 입시 변화는 결국 전국의 모든 미술대학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요하다.

미술대학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홍익대는 이미 오래전 실기고사를 폐지했다. 2008년 실기고사 입시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해 2013년부터는 모든 미술 전공 학과에서 실기시험이 사라졌다. 1차적으로는 공정성 확보를 위한 대처였지만, 실기고사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는 그간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홍익대는 수시와 정시 등 다양한 전형으로 모집하며, 실기고사 없이 ‘미술활동보고서’를 포함한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서 선발하고 있다. 실기 시험은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 미술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없었다면 응시하기가 어렵다. 동시에 내신 등급과 수능 성적이 중요한 것도 당연하다.

홍익대가 실기고사를 폐지할 무렵, 서울대 미대는 수시 100% 선발 방식이었다. 실기로 먼저 10배수를 뽑은 후 서류와 면접으로 나머지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2019년 대학 입시 공정성 문제가 크게 논의되었고, 그간 수시 확대를 권장했던 교육부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대학들에게 정시 확대를 요구하였다. 이때 서울대는 파격적인 변화를 선택한다. 그간의 수시 100% 모집을 거꾸로 정시 100%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실기를 우선했던 이전과 달리 성적을 우선하는 기조다. 덧붙여 그동안 미대 입시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수학 과목을 선발 기준에 반영하게 된다. 지난 30년 동안 전국의 미술대학 입시에서 수학 과목이 필요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매우 큰 변화다.

그리하여 2023년 올해부터 서울대는 디자인과 7명(수시)을 제외한 나머지 신입생 100여 명 전부를 정시로 선발한다. 수능 성적이 5배수 안에 들어야 실기와 면접을 볼 수 있게 된다. 특히 디자인계열은 수능 수학 점수가 100% 반영되고, 순수미술계열은 수학 등급 감점제를 실시한다. 즉, 이제 '수포자'가 서울대 미대를 지원할 경우 불이익이 상당하다. 이러한 서울대의 변화는 다른 대학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묘사력이 탁월한 손재주보다는 창의적 사고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학습 역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예술 창작인에 대한 수요가 높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 세 가지다.


1. 디자인은 우리가 알고 있던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향후 10여 년 안에 디자인 학부가 미대 단과대학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 바로 MIT 미디어랩이다. 우리나라 카이스트와 서울과학기술대학에서도 수년간 이러한 시도들이 보이고 읽힌다. 기술 따로 심미적 디자인 따로인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그림 재주가 있으니 디자이너 하면 좋겠다'는 말은 과거에나 통했다. AI 분야나 공학적 디자인 영역뿐만 아니라, 패션디자인이나 그래픽디자인에서조차 '손재주'는 당연한 기초이되 결정타가 아닌 세상이다.


2. 디자인은 그럼에도 예술 분야에 있다.

그렇다고 디자인이 예술과 분리된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자인이 앞으로의 예술 세계를 이끌게 되어 있다.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을 텐데, 이렇게 이해하면 될 듯하다. 기존의 전통 예술 장르가 해체, 융합되면서 새로운 예술 형태가 태어나는 중이라는 것이다. 고독한 내면을 그렸던 고흐, 고갱의 그림들이 화가의 사후에 수백억 원대로 거래되는 것을 두고 '오리지널리티(독창성)가 있는 고귀한 예술'이라고 여기던 우리의 인식 틀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과거에는 캔버스 하단의 작가 서명이 그것만으로 저작권을 보증하는 법리적 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코인'으로 투자한 예술 저작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공지능이 그린 일러스트도 서서히 시장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NFT(Non-Fungible Token·대체불가능토큰)와 손잡고 태어나는 예술 작품들도 그 판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이러한 영역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 '미디어 아트'다. 현재 해외 미술 시장의 큰 이슈 대부분은 미디어 아트에서 나온다.

3. 미술은 단 한번도 '시장' 없이 움직인 적이 없다.

기성세대가 흔히 가질 수 있는 예술에 대한 오해가 있다. 예술은 자본과 멀어질수록, 예술가가 고독하고 외로울수록, 시대를 잘못 태어나 고생하는 사람일수록 예술(가)이라는 인식이다. 이 인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인식의 카테고리가 틀렸다. 치열한 자의식과 사회의식 속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과 그 창작자에게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그것의 '사유 태도'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예술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예술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예술시장 없이 움직인 적이 없다. 돈이 몰리는 곳에 작품이 나오고, 작품이 나오는 곳에 돈이 몰린다. 전 세계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투어 후원금을 내는 MIT 미디어랩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술과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수긍이 있어야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는 '전혀 새로운 얼굴의 예술'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고결함이 사라지고 대중과 영합한다고 한탄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그만큼 생동적으로 바뀌고 있음도 이해해야 한다.

2013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화제를 모은 의상은 MIT 미디어랩의 네리 옥스만 교수의 작품이었다. 산호충류에서 추출한 물질로 3D 프린팅한 친환경 미래형 텍스타일(옷감)로 만든 의상이었다. 살아있는 박테리아를 재료로 만든 또 다른 의상은 스스로 빛을 내고 햇빛을 받으면 당과 바이오 연료를 생산하여 인간의 손상된 조직을 회복할 수 있다. 네리 옥스만은 의대를 중퇴하고 건축공학과 디자인을 연구했고 MIT 미디어랩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의학과 생물학에서 시작해 건축학, 컴퓨터공학, 그리고 디자인을 융합한 문자 그대로 미래융합형 인물이다. 과학, 공학, 디자인, 예술이 하나의 순환 구조로 이어져 있다는 옥스만 교수의 창의성 이론 강연은 감탄을 넘어 감동을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3년 보스턴 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안토자'는 산호충류에서 추출한 물질로 3D 프린팅한 친환경 미래형 텍스타일이다. 위키피디아 캡처

2013년 보스턴 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안토자'는 산호충류에서 추출한 물질로 3D 프린팅한 친환경 미래형 텍스타일이다. 위키피디아 캡처


2015년 TED 강연에서 네리 옥스만 교수가 박테리아를 재료로 3D 프린팅한 의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브렛 하트만(Bret Hartman), TED 제공

2015년 TED 강연에서 네리 옥스만 교수가 박테리아를 재료로 3D 프린팅한 의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브렛 하트만(Bret Hartman), TED 제공

MIT 미디어랩에는 옥스만 교수팀이 만든 조형물 '아구아오파'가 있다. 언뜻 조각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가성장하는 신소재 유기체다. 퐁피두센터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되었던 옥스만의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예술이고, 한편으로는 융복합연구 결과물이며, 종국에는 미래형 물질을 상상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이렇듯 막대한 연구비로 학문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래를 위한 연금술을 실험하는 MIT 미디어랩은 우리도 곧 마주하게 될 미술대학의 모습이다.

지금 초등학교에서, 어린이집에서 자라는 다음 세대의 예술은 어떠할까? 우리 세대가 우려보다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를 마주하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술'과 '예술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진지하게 재고해야 할 것이다.


송주영 미술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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