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터전 삼은 외국인·무슬림·성소수자들
예로부터 '이방인의 땅'... 개성·다양성 용광로
"참사 아픔 딛고 예전 '자유의 상징' 되찾아야"
‘이태원(梨泰院)’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역원(驛院)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원은 말을 빌리고 숙식을 제공하던 일종의 공영 숙소로 길손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타인(異他人)의 동네에서 비롯됐다” 등 다른 학설도 존재한다. 이렇게 이태원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방인의 땅’이었다. 지금도 국적, 종교, 성(性)적 지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움을 발산하는 활력이 넘쳐난다.
하지만 2022년 10월 29일 일어난 그 사건으로 이태원은 당분간 슬픔과 추모의 대명사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참사 한 달이 지난 현재, 이태원을 삶의 터전 삼은 외국인과 무슬림, 성소수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들은 이태원이 아픔을 딛고 다시금 “차별과 혐오 없는 본래의 모습을 찾았으면 한다”고 한목소리로 소망했다.
소수자 아우르는 '다양성 대명사'
23일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는 여전히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편지와 포스트잇이 가득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스페인어, 독일어, 아랍어, 태국어 등 각종 언어로 작성된 추모글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이태원이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했다는 증거다.
프랑스인 루시앙(30)씨는 6년 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뒤 주말마다 이태원을 찾았다. 그는 “먼저 한국에 자리 잡은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태원을 추천했다”며 “언어도 문화도 낯설었지만 여기선 장벽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20년째 옷가게를 운영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알 이맘 무이나트(56)씨는 이태원을 “생동감과 에너지가 분출하는 동네”로 정의했다. 1년간 한국에서 거주한 20대 프랑스 남성 역시 “인종ㆍ문화의 차이 없이 모일 수 있는 가장 국제적 공간, 그게 이태원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이태원이 소수자의 안식처로 자리매김한 배경이기도 하다. 우사단로에 있는 서울중앙성원은 국내 최초 이슬람성원이다. 예배를 위해 매일 성원을 방문하는 한국인 무슬림 윤모(53)씨는 히잡을 착용하고 거리로 나설 때마다 흘끔대는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태원에서는 눈치를 본 적이 없다. 윤씨는 “이태원은 마음을 여는 법을 가르쳐 준 곳”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레즈비언 바, 게이 클럽, 트랜스젠더 바도 많다. 성소수자들이 꾸밈 없이 성적 지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년 11월 20일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사도 이태원 일대에서 열린다. 20년 전 커밍아웃하고 이태원로에서 레즈비언 바를 운영하는 윤김명우(66)씨는 “남자가 여장을 하고 다니든, 그 반대이든 손가락질하는 이가 없다”고 말했다.
동성애자 A씨는 참사가 터지고 2년 전 성소수자들이 주로 찾던 이태원 클럽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가 속출했을 때가 떠올라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A씨는 “당시 온라인에 떠도는 이태원 클럽 춤 영상에 엄청난 혐오가 쏟아졌다”면서 “한국에서 성소수자 연인이 손을 잡고 걷는 행동은 오직 이태원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사단로의 한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하는 소라(가명)씨도 “소수자를 비난하는 행위를 외려 이상하게 여기는 곳”이라고 했다.
"경계심 없는 자유의 공간 되찾아야"
이태원을 사랑하는 이들이 바라는 건 상업주의의 부활이 아니다. 이태원의 자랑인 다양성과 존중의 가치를 속히 회복하는 것이다. 루시앙씨는 “한국에서 이태원을 대체할 만한 지역은 없다”고 단언했다. 방글라데시 출신 아부바카 시디크씨 역시 “외국인들이 경계심을 갖지 않고 한국사회에 녹아들 수 있는 이태원의 긍정적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태원에서 11년째 사는 한국인 무슬림 김다소(30)씨는 “보호받고, 배려받을 수 있는 장점에 이끌려 이곳을 자주 찾던 분들이 발길을 끊을까 봐 걱정된다”고 말끝을 흐렸다. 성소수자 소라씨는 “혐오가 발 붙일 수 없는 자유의 상징 이태원이 빛나는 거리로 꼭 다시 돌아왔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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