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스라엘 수교 60주년
30여 년 만에 한국 취재진에 공개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중략)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21~23절)
예수는 기독교계에서 흔히 ‘나사렛 예수’로 일컬어진다. 그가 종교 지도자로 활약한 '공생애’ 이전에 이스라엘 북부 나사렛 지방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사렛은 예수의 성장기를 짐작해 볼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독교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특히 예수가 양친인 요셉, 마리아와 함께 유소년기를 보낸 집터로 여겨지는 '요셉의 동굴'이 순례객의 출입을 금지한 지 30여 년 만에 한국 취재진에 공개됐다.
올해 한국-이스라엘 수교 60주년을 맞아 한국 취재진이 방문한 지난달 29일. 인구 7~8만 명의 나사렛은 행인들도 북적였다. 지금은 북부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 중 하나지만, 예수가 살았던 1세기 초반 무렵에는 빈한한 시골 마을이었다. 예수가 거주한 곳으로 기독교계에 전해지는 동굴집 집터는 1914년에 세워진 성 요셉 교회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 성지순례 전문가인 이강근 박사에 따르면 이 집터는 기독교계에서는 최소 5세기부터 예수의 집으로 여겼다. 현재 교회가 있는 자리에는 5세기에는 비잔틴 시대 교회가, 12세기에는 십자군 시대의 교회가 서 있었다.
성 요셉 교회 지하로 들어서면 비잔틴 시대의 세례터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유리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집터를 만날 수 있다. 성 요셉 교회의 조지 루이트 신부에 따르면 교회는 1990년대 초중반부터 성지 보존을 위해서 외부인의 집터 출입을 금지해왔으나 이날 한국 기자단에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루이트 신부가 오랫동안 닫혀 있던 출입문을 열자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가 10여m 이어졌다. 성인이 허리를 굽혀도 머리가 천장에 부딪힐 만큼 낮은 통로를 내려가자 그제야 집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터는 33㎡ 남짓한 면적의 동굴로 간단한 조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벽면 한쪽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외부에서 빗물을 받아 식수를 마련하는 장치라고 한다. 높이 2m 정도의 동굴은 그야말로 소박하고 단출했다. 탐방에 동참한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예수는 왜 이런 허름한 곳에 사셨을까 고민하게 된다”면서 “낮아지고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 요셉 교회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서 기독교계의 또 다른 성지가 자리 잡고 있다.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를 낳을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수태고지)'는 동굴 위에 세워진 수태고지 교회로 원추형 지붕의 높이가 60m에 달한다. 이 자리에는 비잔틴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모두 5개의 교회가 세워졌는데 현재의 교회는 1969년 세워졌다.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마리아 성화들이 벽면에 걸렸는데 한복을 입은 마리아와 예수도 눈에 띄었다.
이스라엘 북부에선 예수가 사역했던 1세기경의 유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대형 유대교 회당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규모 유적지 ‘막달라’는 예수의 죽음을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무덤을 찾아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으로 전해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출신 지역으로 전해진다. 이 박사는 당시 고대인에게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나 ‘막달라 마리아’처럼 이름 앞에 지역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흔했다고 설명했다.
성경에서 예수가 책망했던 마을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부유한 도시여서 부족함을 몰라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고라신과 벳새다 등이다. 고라신에서는 지난 1905년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17m와 23m에 달하는 대형 회당이 발굴돼 당시의 번영을 짐작케 한다. 이 회당은 예수 사후에 세워진 4세기 초 유적으로 추정되지만 그 규모로 볼 때 성경에 기록된 시기부터 고라신이 부유한 지역이었음을 을 뒷받침한다. 이 박사는 천주교와 정교회 등 종파들마다 기독교 성지의 위치가 엇갈리는 지역이 더러 있다면서 “고고학적 증거를 따지기보다는 오래전부터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집터 등으로 성지를 믿어 왔다는 역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