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베트남 사법선진화와 한국
사건정보·판결문 공개도 안 되는 베트남
韓 사법시스템으로 '재판 투명성' 확보 시도
성공 정착 시 韓기업· 교민 활동에도 도움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외국 중재재판소의 판정이 베트남 법 원칙을 위반했으므로 해당 판정 자체를 취소한다."
#. 베트남에서 활동 중인 한국 기업 A사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현지기업 B사와의 법률 분쟁을 하루라도 빨리 종결하기 위해 싱가포르 국제중재재판소까지 찾아 판정을 어렵게 받아왔더니, 현지 법원은 너무도 쉽게 이 모든 절차가 무효라고 했다.
"베트남 역시 외국 중재 판정의 효력을 인정하는 '뉴욕협약' 가입국이기에 판정 취소 행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로펌 측의 설명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여긴 베트남이고 현지 법원이 강제집행 승인을 내주지 않는 이상 중재 판정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A사와 로펌은 "어떤 베트남 법 원칙을 위반했는지라도 알려달라"고 수차례 베트남 법원에 문의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어떤 회신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이들은 베트남 법원의 유사 사례 판결문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이 역시 허사였다. 전자사법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기존 판결문 등 구체적인 사건정보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기 때문이다.
#. 베트남에서 7년째 식당을 운영해온 한국인 C씨는 지난 10월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일 년 전 "투자 지분 및 수익 분배율을 올려달라"는 베트남인 동업자 D씨의 요구를 쉽게 생각했던 게 분란의 시작이었다.
적정 수준에서 분배율 등을 올려줬더니, 이후 D씨는 사업권 자체를 넘기라고 협박을 일삼았다. 황당한 요구를 거절하자 C씨 가게에는 베트남 건달들의 행패가 이어졌다. 참다못한 C씨는 D씨를 영업방해 및 협박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증거는 명백했고 사건은 법에 따라 정리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수사 과정부터 합의 종용이 이어지더니 실제 재판에서도 "이쯤 하면 충분하니 합의하고 소를 취하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더 이상 답이 없음을 직감한 C씨는 소송을 포기했다. C씨는 "소송 당사자가 사건검색을 할 수도 없고 재판부 배당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이후 "가장 기초적인 정보조차 접근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찾아오는 사람은 '판사랑 친한 현지 변호사를 통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는 현지 사법 브로커뿐이었다"는 하소연만 남긴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韓대법원이 이식한 '사법전산 시스템', 내년엔 베트남 모든 지역에 적용
'사법 후진국' 베트남에서 고통받고 있는 한국 기업과 교민은 A사와 C씨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툭하면 이상한 이유로 세금 징수를 일삼는 세관에 법률적 대응을 하다 두 손을 든 봉제 업체, 결혼 후 현지 여성에게 재산을 갈취당했으나 사법적 구제를 받지 못한 청년 등 '베트남 사법 리스크'로 힘들어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피해 사례가 누적되자,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이 발동됐다. 선봉에는 한국 대법원이 섰다. 우리 대법원이 베트남에 한국형 통합사건관리시스템을 전수하는 방식으로, 현지 기업과 교민들도 최소한의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베트남도 한국의 도움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2008~2017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지원으로 진행된 우리 대법원의 1, 2단계 베트남 사법 지원사업이 법원연수원 완공 등 '하드웨어 확충'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같은 기간 초청연수제를 통해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베트남 법관 수 역시 중기(3개월) 과정 160명, 단기(1개월) 과정 290명에 달했다. 베트남 사법부 내 '지한파'로 불리는 이들은 우리 대법원 사업을 적극 수용하는 데 앞장섰다.
한국이 전수하는 통합사건관리 시스템은 '투명한 재판 절차' 확보에 방점이 찍혀 있다. 실제로 한국형 시스템은 C씨 사례에서 언급된 '사법부와 브로커의 뒷거래'를 차단하기 위한 '사건 무작위 배당' 체계 구축이 기본이다. 이어 일반 시민들이 재판 기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된 '나의 사건 조회' 기능과 판사들이 실무에 사용할 '판례 구축 및 열람' 프로세스도 설치한다. A사가 그토록 원했던 기존 판례를, 앞으로는 전자화된 데이터로 구할 수 있도록 바꾸겠다는 취지다.
코로나19 사태로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된 한국형 사법시스템 이식 사업은 올 하반기 그 윤곽을 드러냈다. 한국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베트남 최고인민법원장이 지난 10월 한국 시스템의 사용을 최종 승인한 것이다. 향후 베트남 사법부는 최고인민법원과 항소심을 진행하는 하노이 고등법원, 1심 재판이 이뤄지는 하노이 및 하이퐁시 인민법원 등 총 44개 법원에서 한국형 시스템을 시범 운영한다. 이어 내년 10월부턴 베트남 63개 지방성(省)의 모든 법원에도 같은 시스템이 장착될 예정이다.
성공적으로 작동된 시스템, 최고인민법원장 "한-베 계속 함께하자"
반가운 소식을 접한 김상환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6일 수도 하노이를 직접 찾았다. 이날 최고인민법원에서 진행된 한국형 통합사건관리시스템의 첫 구동 및 시연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그의 앞에서 작동된 한국형 시스템은 깔끔하게 사법 정보를 분류·처리했다. 각급 지방법원의 노후 PC 교체 등 현장의 기술적 문제는 남았으나, 적어도 한국 시스템의 핵심 틀이 베트남 사법부에 성공적으로 이식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김 처장은 이날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선 재판절차 투명성 제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한국형 사법 시스템을 믿고 꾸준히 활용한다면 베트남이 목표로 한 사법개혁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현재 베트남 공산당은 각급 법원을 2030년까지 전자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2030 사법개혁'을 사회발전전략의 핵심 과제로 선정한 상태다.
응우옌화빈 최고인민법원장도 김 처장의 문제의식에 동의했다. 그는 "한국형 시스템을 통해 (외국인을 포함) 모든 인민의 재판 접근성을 강화하고 법관들의 업무 처리 효율성도 높일 것"이라며 "앞으로도 한국과 함께 시스템을 고도화해 목표한 사법개혁을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약속했다.
"현지 한국 기업활동·교민 일상생활 안정성 크게 증가할 것"
베트남의 한국형 사법시스템 구동 소식을 들은 한국 기업과 교민들은 반색했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제대로 시스템이 정착만 된다면 베트남 특유의 '깜깜이 재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배용근 법무법인 태평양 베트남법인 대표변호사는 "한국기업이 베트남 기업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계약을 잘 체결하고도 '베트남 법원의 불투명성으로 계약 효력이 부정당할 수 있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다"며 "한국형 사법 시스템이 도입되면 이 같은 리스크가 줄어들어 좀 더 안정적인 기업 활동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5만 재베트남 교민들 역시 기대에 부푼 모습이다. 장은숙 하노이 한인회장은 "한국 변호사 등 전문가로 구성된 '위드'(WITH) 센터를 통해 긴급 법률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밤낮없이 접수되는 피해 사례를 모두 감당하기 벅찬 게 사실"이라며 "실제로 베트남의 사법절차가 예측 가능해지기만 해도 교민들은 매우 안심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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