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압박에도 서슬퍼렇게 맞섰던 한암 스님
을축년 홍수 때 사찰재산으로 빈민 구제하고
6·25 때는 온몸으로 소각위기 상원사 지켜내
내가 한암 스님에 대해 알게 된 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손명현의 수필 '어떻게 살 것인가' 때문이다. 수필은 손명현이 직접 평창 오대산에 간 일에서 시작된다.
당시 오대산의 큰절인 월정사는 한국전쟁 중 아군들에 의해 소각되어 쓸쓸하고 황폐한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산 안쪽의 상원사는 멀쩡했다. 손명현은 궁금해서 연유를 물었고, 그 과정에서 한암 선사에 대해 듣게 된다.
한암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총 4차례나 종정으로 추대되는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실제로 한암이 1926년 강남 봉은사의 최고 어른인 조실을 등지고 오대산으로 은거하며 남긴 '귀산시(歸山詩)'는 그의 청정하고 고결한 인품을 잘 나타내준다.
내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춘삼월(春三月)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배우지 않겠다.
'귀산시'를 끝으로 한암은 26년간 오대산 밖을 나서지 않고, 오직 수행과 후학 지도에만 매진했다. 한암이 오대산에 은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1925년 4개의 태풍이 몰아닥친 을축년 대홍수도 한몫했다. 이때 한암은 봉은사 주지에게 지시해 절 재산을 쏟아부어 인명 구제에 앞장섰다. 이렇게 구한 인원이 무려 708명이나 된다. 이는 우리 역사상 민간이 구한 최대의 구제사업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경기 일대에 한암이 '살아 있는 붓다' 즉 생불(生佛)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이로 인해 수행에 번잡함이 끼자, 한암은 분연히 오대산행을 감행한 것이다.
한암이 활약하던 일제강점기에는 불교에도 많은 회유와 압박이 있었다. 일제로서는 종정의 협조가 있으면 선전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42년 일본 총독 미나미는 한암을 총독부로 초청한다. 그러나 한암은 '나는 산문 밖을 나서지 않고 일생을 수행하기로 서원을 세운 사람'이라며, 총독의 요구를 거절한다.
이로 인해 부총독격인 정무총감 오노로구이치로가 특사로 상원사를 방문하게 된다. 이때 먼 길을 오게 돼 짜증이 난 정무총감은 "이번 전쟁(태평양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이길 것 같습니까?"라는 무례한 질문을 한다. 그러자 한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덕 있는 나라가 이긴다(덕자승·德者勝)"라고 답했다. 일제를 찬양하기를 원했던 우문에 대한 현답이 아닐 수 없다.
한암의 의연한 모습에 존경심을 느낀 정무총감은 이번에는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신의 일생에 지침이 될 글을 요청한다. 그러자 한암은 즉석에서, "정심(正心·마음을 똑바로 하라)"이라고 써 주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서슬 퍼런 진정한 고승의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이 소문나면서 이후에는 일본 고관들의 참배가 줄을 잇게 된다.
일제가 물러가고 광복이 되면 다 끝날 줄 알았다. 뒤틀린 것은 바로잡히고, 새로운 희망이 새 세상을 덮으려니 했다. 그러나 웬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오대산은 더 큰 비극으로 내몰리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하는가 싶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혼돈으로 치달았다.
1951년 1·4후퇴 때 퇴각하던 국군은 산사가 적들의 기지로 활용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소각을 단행했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아군은 국보 사찰은 불태우지 않는다며, 스님들을 안심시켜 피난케 한 뒤 소각했다. 실로 기만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암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앉아서 생사를 맞겠다(좌당생사·坐當生死)'며 피난을 거부했다. 그러다 아군이 상원사를 소각하러 오자, 한암은 담담히 법당에 앉아 "승려는 죽으면 화장하는 것이니, 소각하라. 군인은 명령을 따르면 되니, 부담 갖지 말라"고 말한다. 너무나 의연한 태도에 군인들은 문짝만 태우고 물러가게 된다. 손명현이 들은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일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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