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 외면하는 '급전' 창구]
대부업체 "금리 20%여도 안 빌려주는 게 본전"
저축은행·카드사 저신용자 신용대출 속속 중단
'정부 보증' 근로자햇살론도 취급 유인 줄어 감소
지난달 25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청과물시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땅바닥에서도, 전봇대에서도 자취를 감춘 것은 바로 '급전 빌려준다'는 대부업 명함이다. 시장 상인들은 "여름까지만 해도 숱하게 보이던 명함이 가을부터 잘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겨우 발견한 명함은 뿌려진 지 오래된 듯 아스팔트 무늬가 눌어붙어 있었다.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해 최근 홍보가 줄어든 이유를 물었다. 해당 업체는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합법 대부업체였다.
"시장 상인들 말이 맞아요. 명함 안 뿌린 지 꽤 됐습니다. (왜죠?) 장사가 안 되니까요. 돈 빌려 달라는 사람은 늘 있죠. 그런데 10개를 빌려주면 요새는 절반은 돈을 안 갚습니다. 담보·신용평점 다 따져서 빌려줘도 그래요. 그러니 법정최고금리(20%)를 가득 채워 받아도 차라리 안 빌려주는 게 본전이죠. 개점휴업이라고 보면 됩니다."
청량리 대부업 관계자
취약계층이 대출시장에서 쫓겨나고 있다. 국내외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 여파에 경기침체 가능성까지 부각되자, 대출시장 가장 밑바닥에 놓인 취약계층 돈줄부터 급격히 쪼그라든 것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차주가 이용했던 저축은행·카드사·대부업 등 곳곳에서 '대출 중단'이 이어지면서 이들이 불법 사채시장으로 밀려날 우려도 커졌다.
저축은행·카드사 속속 '대출 중단'
우선 저신용자가 주로 이용하는 저축은행부터 돈줄이 막히고 있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10월 전국 79개 저축은행 중 개인신용대출을 3억 원 이상 취급한 곳은 총 32곳으로, 1년 전(38곳) 대비 6곳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32곳 중 9곳은 신용평점 600점 이하 차주에겐 대출을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통상 신용평점 600점 이하 차주는 취약차주로 분류된다.
대출금리 역시 더 가혹해졌다. 10월 신용평점 600점 이하 차주가 저축은행에서 받은 신용대출의 평균 금리는 17.5%로 집계됐다. 1년 전(16.7%) 대비 0.8%포인트 상승한 수치로, 법정 최고금리(20%)에 더 가까워진 셈이다. 돈 빌려주는 곳은 점점 줄어들고 금리는 더 높아졌다는 얘기다.
카드사가 운영하는 카드론 상황도 마찬가지다. 카드론은 카드사가 운영하는 신용대출로 급전이 필요한 중·저신용자가 주로 이용한다. 한 대형 카드사는 9월 말 저신용자(신용평점 635점 이하)의 대출 잔액이 3개월 전보다 10% 이상 감소했다고 전했다. 우리카드는 아예 9월 이후부터 신용평점 600점 이하 차주에겐 카드론을 취급하지 않고 있다.
저축은행·카드사들이 대출 창구를 닫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치솟은 조달금리와 리스크 관리다. 기준금리 인상에 더해 레고랜드 사태 여파로 채권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금융회사 역시 돈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특히 저축은행·카드사 모두 부실 대출 규모가 증가하면서 취약계층 취급 규모를 줄이는 식으로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게 됐다.
저축은행 관계자는 "저축은행은 다중채무자(3개 이상 금융기관에 대출이 있는 취약차주) 고객이 많은데 내년부터 이들을 취급하면 충당금을 더 쌓아야 한다"며 "대출금리 인상엔 한계가 있는데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니 대출을 꺼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드사 관계자는 "수신(예금) 기능이 없어 채권을 통해 돈을 마련하는 카드사는 올해 초 대비 조달비용이 2배 이상 올랐다"며 "당연히 대출 취급을 더욱 까다롭게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불법 대부업 희생양 된 취약계층
2금융권에서 밀려난 취약계층은 이른바 '3금융권'이라 불리는 대부업으로 밀려들고 있다. 대부업 중계 플랫폼 '대부나라'에는 "돈을 빌려 달라"는 게시글이 이달에만 하루 평균 약 500건이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대부업계 1·2위 업체인 러시앤캐시·리드코프조차 신규 대출을 대폭 축소할 정도로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오히려 판치는 건 불법 대부업이다.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불법 사금융 검거 건수는 1,046건으로 전년 대비 20% 증가했다. 대구에서 10여 년간 합법 대부업을 운영 중인 A씨가 최근 불법 대부업 실태를 들려 줬다. 과거처럼 돈을 빌려주고 고금리로 갈취하는 게 아니라 요즘엔 애초부터 아예 돈 빌려줄 생각이 없다고 한다.
"만약 300만 원이 필요한 사람이 오면,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20만 원을 먼저 빌려주고 월 이자 20만 원(연이율 1200%)을 받아요. 이렇게 3~4회 돌리면 한 사람 당 80만 원 정도를 뽑아낼 수 있어요. 그럼 그 뒤에 300만 원을 빌려주느냐. 절대 안 빌려줘요. 연락을 안 받거나 잠적하는 게 요즘 유행하는 수법입니다."
대부업 관계자
정부 보증 상품도 외면… "할 이유가 없다"
정부가 추진하는 취약계층 대상 서민금융정책 상품도 일부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정부가 취약계층을 위해 마련한 근로자햇살론은 저축은행에서만 신청할 수 있는데, 최근 들어 해당 상품 취급을 중단하는 저축은행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실제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이 국회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올해 근로자햇살론 취급 건수와 금액은 각각 전년 대비 7.7%, 9.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자햇살론은 부실 시 대출금의 90%를 서금원이 보장해 주는 보증 상품으로, 신용평점 하위 20% 조건 등을 만족한 취약차주가 최대 10.5% 대출금리로 이용할 수 있다. 정부가 90%를 보증해 사실상 돈 떼일 걱정이 없기 때문에 평소엔 저축은행들이 적극적으로 취급했던 상품이다. 게다가 금융위원회는 올해 2월부터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대출 한도를 500만 원 높여 2,000만 원까지 증액해 주기도 했다. 저축은행 관계자 얘기를 들어봤다.
"근로자햇살론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 금리가 10.5%인데요, 이 중 서금원에 낼 돈이 5%포인트 정도고,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이익은 나머지 5%포인트 정도예요. 그런데 조달비용이라 할 수 있는 예금금리가 2%대에서 6% 가까이 올랐어요. 인건비·판관비·전산비가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조달비용이랑 합치면 10%는 족히 넘습니다. 여기에 부실이 생기면 10%는 우리 책임인데 그것까지 고려하면 본전 아니면 손해예요. 한마디로 현재 상황에서 근로자햇살론을 취급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죠."
저축은행 관계자
전문가들은 취약계층 지원에 대한 민간 부분 유인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형석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위기 상황에선 재원을 늘려 한시적으로나마 서금원이 가져가는 수입을 줄이는 식으로 민간 금융회사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경원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민간 참여만으로 부족하다면 서금원의 역할을 더 강화하든지, 정부가 직접 취약계층을 담당할 금융기관을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