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추락.'
언론의 자유를 평가∙감독하는 기관 중 가장 공신력을 인정받는 '국경없는기자회(RSF)'가 올해 내놓은 평가다. 지난해 언론의 자유가 전 세계 180개국 중 70위였던 그리스는 1년 만에 108위로 주저앉았다. 유럽연합(EU) 27개국 중 꼴찌다.
지난해 발생한 기자 살인 사건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순위를 끌어내렸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가 언론을 탄압하고 길들이려 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중도 우파 정당인 신민주주의 대표인 미초타키스 총리는 2019년 7월 정권을 잡았다.
한국일보는 그리스 언론 상황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수도 아테네를 찾았다. 정부 견제 보도를 끈질기게 해 온 언론사 2곳(도쿠멘토·리포터즈 유나이티드)의 기자들과 이달 초 만났다. 야당인 인사들, 시민들과도 인터뷰했다.
그리스 여권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 취재할수록 한국 정치권과 언론이 겹쳐졌다. 올해 한국 언론 자유의 순위는 43위(RSF 기준). '닮은꼴'을 한 그리스의 상황은 "한국도 방심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① 광고로 언론사 길들이기
미초타키스 총리는 정권 초기부터 '눈엣가시'인 언론사를 솎아 내고자 했다. 정부 광고를 끊거나 기업 광고를 끊도록 압박했다. 탐사보도로 유명한 도쿠멘토가 그 대상이 됐다.
도쿠멘토 기자 토니 리고폴로스에 따르면, 정부는 광고주들에게 "광고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1974년 군사 정권 종식 이후 없던 일이었다. 기업들은 정권 눈치를 봤고, 신문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도쿠멘토의 재정은 바닥이 났다. 미초타키스 총리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비판적 보도를 그만두거나, 죽으라"는 것.
그리스 정부는 갈수록 치사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정책 홍보를 위한 광고를 2,000만 유로(약 275억 원) 규모로 집행했다. 유령 언론사에도 광고를 줬지만, 도쿠멘토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광고 집행 원칙은 없었다. 야당인 시리자의 스테르지오스 칼파키스 대변인은 "도쿠멘토를 뺀 유일한 기준이 있다면 정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꼼수를 썼다. 제3 기관에 광고비 분배를 맡겨 정부엔 책임이 없는 것처럼 위장했다.
편파적 광고 집행으로 피아를 가른다는 비판에서 한국의 보수·진보 정권 모두 자유롭지 않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5년간 TBS에 집행한 광고 금액이 178억 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직전 보수 정권 때보다 약 5, 6배가량 늘어난 액수였다(정동만 국민의힘 의원실 자료).
윤석열 정부 들어선 MBC에 대한 광고 제재를 압박하는 취지의 발언이 여권에서 나왔다. 김상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은 지난달 "MBC가 편파·왜곡 방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업들이 광고 제공을 즉각 중단하는 게 의무라고 역설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언론 리포터즈 유나이티드의 토도리스 촌드로지나노스 기자는 한국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특정 언론을 광고 등에서 배제하는 건 전체 언론이 정부 눈치를 보게 만드는 방식이자 언론의 권력 감시 의지를 꺾는 일"이라고 말했다.
② '가짜뉴스 처벌'로 위협
그리스 여권은 지난해 11월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들었다. '대중의 두려움을 야기하거나, 국가경제·공중보건을 해치는 가짜뉴스를 보도하면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게 골자다. 기자와 언론사 모두 적용 대상이다.
이 법은 지난해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입법하려다 실패한 '언론중재법'(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닮았다. 언론중재법안은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최대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물린다'는 내용이었다.
현 정부에선 여권 핵심 인사들이 "가짜뉴스 엄단"을 외치는 일이 많다. 이달 1일 학술원 회원 간담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가짜뉴스 추방 의지를 강조했다.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막았을 때도 "가짜뉴스로 한미 동맹을 이간질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가짜뉴스를 규정·판별하는 객관적 기준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치권과 정치 팬덤은 "불리하면 가짜뉴스"라고 치부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뉴스 처벌법은 권력 견제 보도를 틀어막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촌드로지나노스 기자는 "가짜뉴스라는 표현은 권력자가 언론의 입을 막는 '가장 쉬운 수단'이다"라며 "가짜뉴스의 해악이 걱정된다면 정보를 거를 눈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부터 고민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
③ 하고 싶은 말만 하기
그리스 정부는 친정부적 매체하고만 소통한다. 그리스의 대표적 친정부 매체로 알려진 A신문의 지난달 28일 치를 살펴본 결과, 현직 장∙차관 인터뷰만 3건이 실렸다. 60여 페이지 중 정부 비판 기사는 없었고, 정책 홍보 기사만 가득했다.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 정부가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고 있다는 뜻이다. 리고폴로스 기자는 "보도 전 사실 확인을 위해 질문해도 답하지 않다가 보도가 나온 뒤 친정부 성향 매체와 인터뷰해 반박하는 건 정부의 대표적 패턴"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출근길 도어스테핑(약식 회견) 중단도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문재인 정부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재임 중 기자회견은 10번에 불과했다.
④ 소송으로 재갈 물리기
그리스 정부는 보도 삭제와 수정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비판적 보도가 나오면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할 뿐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건 언론의 오래된 불만이다. 항의 후엔 소송이 이어진다.
도쿠멘토는 최근 3년 반 동안 정부로부터 약 80번 고발당했다. 리고폴로스 기자는 "정부는 자신들이 제기한 소송을 근거 삼아 '도쿠멘토는 소송이 자주 걸리는 질 나쁜 언론사'라고 매도한다"고 꼬집었다.
소송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언론사의 입을 막을 수 있다. 언론 자유 모니터링 기관 '미디어 자유 신속 대응'은 "'전략적 봉쇄 소송'은 그리스에서 중요한 문제"라며 "법적 위협은 언론사의 자기 검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소송을 걸면 언론사는 취재∙보도에 집중할 수 없다. 송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촌드로지나노스 기자는 "국제기구 지원을 받아 비용을 마련할 때도 있지만 늘 그럴 순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여권발 소송전이 확대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박성제 MBC 사장 등을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설득과 설명보다는 '법을 통한 해결'을 중시하는 것이 현 여권의 기조에 가깝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도 언론에 소송을 건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 신문 외부 필자 칼럼까지 고발했다.
⑤ 언론 폭력 방치·조장하기
그리스 기자들은 폭력에 자주 노출된다. 살해 협박을 받는 일도 많다. 네덜란드 국적의 외신기자는 미초타키스 총리에게 불손한 태도로 질문했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도쿠멘토는 본사 공격을 우려해 경비 시스템을 바꿨다.
그리스 정부는 적극 말리지 않는다. 지난해 조직 범죄를 추적하던 기자가 살해당했으나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언론 및 미디어 자유를 위한 유럽센터(ECPMF)'는 "언론인이 안전하게 보도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정치권이 기자들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기도 한다. 기자 실명을 거론하는 일명 '좌표 찍기'를 통해서다.
한국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정치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입에 올리는 때는 상대편이 언론의 자유를 탄압할 때가 유일하다.
전투력 넘치는 팬덤을 거느린 민주당도 '좌표 찍기'로 악명이 높았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이재정 민주당 의원 등이 기자 실명을 SNS에 올렸고, 지지층은 기자에게 린치를 가했다.
촌드로지나노스 기자는 "언론에 대한 폭력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건 잠재적 가해자들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신호이며, 언론인에게는 '너희를 아무도 보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라고 꼬집었다.
알 권리 박탈당한 시민들… "무너지기 전 바로잡아야"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이 약해지자, 그리스 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국민들이 코로나 봉쇄로 고통받을 때 배우자와 자전거를 타고 여당 인사들과 파티를 벌이는 등 방역 수칙을 위반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가 비슷한 사건으로 퇴진 수순을 밟게 된 것과 대조적이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최근 RSF 보고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쓰레기"라고 무시하기도 했다.
시민들도 언론의 자유가 망가진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리 라브리니씨는 "민주주의 산실인 그리스가 나쁜 평가를 받고 있는 건 역설적인 일"이라고 했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그리스인의 7%만 "언론이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답했다.
그러나 야당은 대안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칼파키스 대변인은 "방송이 정부에 장악되면서 우리의 목소리는 늘 사라지곤 한다"고 토로하기만 했다. 국민들은 무력해졌다. 아테네 시민 마그다씨는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스 기자와 정치인들은 한 가지 지점에선 같은 목소리를 냈다. "언론의 자유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지만 회복할 길을 찾는 건 어렵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훼손될 징후가 있다면 재빨리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가 한국에 주는 묵직한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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