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1년, 논란에 답하다]
<상> 9가지 준수사항은 꼭 지켜야
중대산업재해 사망 사건 기소 5건 분석
검찰, 안전체계 의무 명시한 시행령 주목
체계 없으면→안전 조치 X → 재해 발생
산업재해를 '순차적 인과관계'로 해석해
의무 미이행 땐 원청 대표에 책임 물어
올해 3월 29일 오전 대구 달성군 성림첨단산업 내 공장 신축 현장. 20년 경력의 베테랑 철골공 A(54)씨가 땅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는 공장 지붕층에서 철골을 연결하는 볼트 체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설마…" 현장 인부들은 11m 아래 바닥을 바라봤다.
A씨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고 출혈이 심했다. 병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결국 숨졌다. 사인은 '다발성 안면부 골절'. 추락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A씨는 철골들만 겨우 연결된 공장 지붕층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2m 이상 높이에서 작업할 때 사용하는 '고소 작업대'에서 벗어나 있었다. 폭이 1m도 안 되는 지붕 철골 위에서 볼트를 조이다가 추락한 것이다. A씨가 이동한 공간은 성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발을 교차로 옮겨야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A씨는 고소 작업대를 이용해 안전하게 지붕층까지 올라갔지만, 잠겨 있어야 할 작업대 문이 열려 있었다. A씨가 문을 닫지 않았던 걸까. 아니다. 문은 처음부터 닫을 수 없도록 열린 채 철사로만 묶여 있었다. 규정상으론 추락 방지를 위해 작업대 내에서만 일하도록 돼 있지만, A씨는 작업대를 벗어나 철골 위로 몸을 옮겨야 했다.
추락 위험이 있는 현장에선 '안전대'라는 조끼를 입게 한다. 안전대에 연결된 로프를 '안전대 부착설비'로 불리는 지지로프에 걸어야 한다. 높은 곳에서 일하는 작업자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선'이다.
하지만 A씨가 작업했던 공장 지붕층에는 안전대에 연결할 수 있는 로프도 없었고, 지지로프도 없었다. 안전대를 입은 A씨만이 안전 규칙을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지검 서부지청은 A씨가 소속된 하청업체 IS중공업과 원청업체인 LDS산업개발을 수사한 뒤, 원청업체 대표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 "중대재해법 '안전한 환경' 조성에 방점"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돼 가지만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사망자가 있거나 중상자가 다수 발생한 사고에서 안전보건관리체계가 확보되지 않았다면,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법의 요지. 경영계는 "과도한 처벌 기준"이라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노동계에선 "생명을 지키는 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엔 정부에서 '중대재해감축 로드맵'을 내놓으며 공방에 불을 지피고 있다. 형사처벌보다는 자율 규제를 통한 예방이 중요하다는 게 로드맵의 주요 내용.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까지 "법 자체에 결함이 많다"며 보완 입법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검찰은 그러나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1년 동안 A씨 사건을 포함해 사망 사건으로만 5건을 기소했다. 모두 하청업체 현장소장이나 대표가 아닌 원청업체 대표에게 책임을 물어 법정에 세웠다. 기존 산업안전보호법의 잣대로 들이댔다면, 현장 책임자나 하청업체 선에서 마무리됐을 사건이다.
검찰은 "중대재해법은 무조건 대표를 기소하고 처벌하는 법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도한 처벌이라는 경영계 시각은 오해라는 것이다. 기존 산업안전보호법상으로는 현장에서 사고 책임을 모두 져야 했다면, 앞으로는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안전한 노동환경 조성 의무를 지켰는지 따져보겠다는 게 검찰 설명이다. 이원석 검찰총장도 구성원들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중대재해법 시행 첫해에 실효성을 평가하기는 어려우며 지속적으로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해 산업재해를 줄이고 예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검찰은 어떤 기준으로 중대재해법을 적용했을까. 한국일보는 올해 검찰이 원청업체 대표를 기소한 사망 사건들을 분석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부여된 의무가 어떤 것인지 살펴봤다.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체계 확보 의무 9가지
검찰은 산업재해를 수사할 때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조치 의무자'와 중대재해법상 '안전보건관리체계 확보 의무자'를 구별하고 있다. 대부분의 산재 사고는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요구하는 안전 조치가 이행되지 않아 발생한다. 현장소장은 안전 조치 의무자로 형사처벌 대상이다. A씨 추락 사건의 경우, 검찰은 △고소 작업대 이탈 △안전대 부착설비 미설치 등을 문제 삼아 원청업체인 LDS산업개발과 하청업체인 IS중공업 현장소장에게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주목할 점은 검찰이 안전 조치 의무 미이행 원인을 중대재해법상 '안전보건관리체계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봤다는 점이다. 안전보건관리체계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안전 조치 의무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게 되고→산재 원인 제거에도 실패해→재해가 발생했다는 '순차적 인과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검찰이 사업자나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체계 확보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중대재해법 시행령 4조에선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유형을 9가지로 명시했다. ①안전보건 경영 방침 마련 ②안전보건 업무 전담 조직 마련 ③유해 위험요인 확인 및 개선 절차 마련 ④재해예방 예산 편성 및 집행 ⑤안전보건 관리책임자 업무수행 평가 ⑥산업안전보건법에 정해진 안전보건관리자 및 산업보건의 배치 ⑦안전보건 관련 종사자 의견 청취 절차 마련 및 개선 이행 점검 ⑧중대산업재해 발생 시 작업 중지 등 매뉴얼 이행 점검 ⑨하도급 업체의 안전보건 확보조치 준수 여부 판단기준 마련이다.
검찰은 A씨 추락 사고의 경우, 원청업체인 LDS산업개발이 9가지 의무 중 안전보건 경영방침 마련 등 4가지(①③⑤⑨)를 지키지 않았다고 봤다. 검찰은 LDS산업개발이 구비한 서류를 모두 검토했지만 안전보건관리체계 관련 내용이 담긴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다. "안전보건 경영방침은 없었고 알지도 못한다"는 안전보건책임자들의 진술까지 나왔다. 검찰은 이를 바탕으로 LDS산업개발 대표를 중대재해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아침 조회는 '위험 청취 절차' 아냐…허수아비 CSO도 안 통해
일부 기업에선 △안전보건관리체계가 갖춰져 있고 △대표에게 안전관리업무 권한이 없기 때문에 안전보건 담당 임원(CSO)이 경영책임자라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2월 19일 경남 고성군 고려해운 조선소 선박 수리공사 현장에서 하청업체인 지와이엔지니어링 직원 B씨(55) 사망 사건과 관련해 원청업체인 삼강에스앤씨 대표가 기소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B씨는 4만 톤 규모 선박 내부를 보수하려고 가스 호스를 옮기다가 끊어진 난간 사이로 추락해 사망했다. 추락 위험이 높은 공사 현장에선 난간 밖에 촘촘한 그물 형태의 '추락방호망'을 설치해야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지지로프인 안전대 부착설비도 해당 난간 부근에 없었다.
창원지검 통영지청은 ⑦안전보건 관련 종사자 의견 청취 절차를 마련하고 개선 이행 여부를 점검했는지 살펴봤다. 원청업체인 삼강에스앤씨는 '아침 조회'를 의견 청취 절차라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사측이 일방적으로 특이사항을 전달하는 자리였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 다른 쟁점은 CSO를 최종 책임자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삼강에스앤씨는 중대재해법 시행에 맞춰 CSO를 임명해 대표는 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맞섰다. 하지만 검찰 판단은 달랐다. △안전보건 관련 서류를 보면 CSO가 결재한 뒤에 대표가 또 결재했고 △매주 임원 회의에서 대표가 안전 분야에 대해 CSO를 지적하는 장면이 목격되는 등 대표가 경영책임자로서 안전보건 업무를 관장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하청업체에도 '재해예방 능력' 평가해야
올해 3월 16일 경남 함안군 한국제강 철강제조 공장에서 발생한 '깔림사'와 관련해선, 검찰은 하청업체가 원청업체 사업장에 상주한다고 해도 산재 예방 능력을 평가하지 않았다면 원청업체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제강의 하청업체인 강백산업 소속 직원 C(65)씨는 1.2톤 무게의 철강판 표면을 깨끗하게 연마하는 작업을 하다가 강판이 떨어져 깔렸다. C씨는 허벅지를 크게 다쳤고 결국 출혈성 쇼크로 사망했다. 크레인으로 철강판을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중간 연결고리(샤클)를 이용하지 않고 노후된 섬유벨트를 날카로운 철강판 고리에 체결하는 바람에 벨트가 끊어진 게 직접적 사고 원인이었다.
창원지검 마산지청은 한국제강이 2014년부터 강백산업을 상주시키면서도 ⑨하도급업체(강백산업)가 안전보건 조치를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평가하지 않았다고 봤다. 실제로 강백산업 대표의 "안전보건 조치를 지키지 않았다"는 진술과 한국제강 대표의 "기준을 만들어 평가했으면 (하청업체도) 따르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라는 진술이 기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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