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의 자격 '증거능력', 증거로서 가치 '증명력'
증거능력 관문 통과해야 유죄 근거로 인정받아
'정영학 녹취록' 편집·조작 없으면 증거능력 생겨
남욱 '들었다' 판사 앞 증언 자체는 증거능력 있어
'전문증거' 해석 때 김만배 확인해주면 가치 커져
재판부는 판단 유보… 다른 증거 종합해 살필 듯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 재판에서 녹취록과 전문 진술 등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해지면서 '증거능력'이 유·무죄를 가를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대장동 일당의 대화 내용이 담긴 '정영학 녹취록'과 관련해 신빙성 논란이 제기된 가운데, 남욱 변호사가 김만배씨에게 들었다는 법정 진술이 잇따르면서 재판부가 '전언'을 얼마나 인정할지를 두고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증거능력 인정돼야 유죄 증거 자격… 증명력은 판사 자유
형사소송법에선 '사실 인정은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증거재판주의를 대전제로 삼는다. '증거능력'은 엄격한 증명이 필요한 범죄사실 등을 인정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자격'을 뜻한다. 증거능력이 있어야 판사 앞에 놓일 수 있지만, 증거능력이 있다고 곧바로 혐의가 인정되는 건 아니다. 믿을 만한 증거로 실질적 '가치'가 얼마나 있는지를 의미하는 '증명력'이 높다고 인정받아야 한다.
증거능력 관문을 통과해야 해당 증거의 신빙성에 따른 증명력을 따져보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증거 가치가 높다고 해도 증거능력이 없으면 유죄 인정을 위한 증거로 쓸 수 없다. 증거능력이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법에 엄밀히 규정돼 있지만, 증명력은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전적으로 법관 판단에 달려 있다. 증거능력이 있는 여러 증거 중 어떤 증거를 선택해 사실을 인정할지도 법관이 정한다.
원칙적으로 △위법 수집 증거(영장 없이 압수한 물증 등) △임의성 없는 진술(고문, 협박, 플리바게닝에 의한 자백 등) △전문증거(경험사실을 들은 타인이 법원서 진술한 전문진술, 수사기관 작성 진술서 등)의 증거능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증거능력과 관련해 검찰과 피고인 가운데 한쪽이 동의하지 않으면, 증인신문 등으로 진정성을 입증해 법원이 인정하면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스모킹건' 정영학 녹취…증거능력 인정 범위는
그렇다면 대장동 재판의 '스모킹건'으로 꼽혀온 '정영학 녹취록'은 증거능력이 인정될까. 직접 녹음한 파일과 이를 옮긴 녹취록을 검찰에 제출한 정영학 회계사를 제외한 다른 피고인들은 위·변조 가능성을 제기하며 증거능력을 문제 삼고 있다. 수많은 녹음파일 중 수십 개만 선별해 녹취록을 임의로 작성하고 편집했을 가능성이 있는 데다, 음질도 좋지 않아 녹취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단 취지다.
녹취록의 경우 일종의 '간접 진술'이 법원에 제출된 것이기 때문에 전문증거 성격을 띤다. 이에 녹음·작성한 이를 증인으로 불러 이 증거가 원본과 동일한 것이고, 사실과 다름없다고 법정에서 인정받으면 증거능력이 부여된다. 증거능력이 생겨도 피고인 측은 증인을 반대신문해 신빙성을 낮추거나 검찰의 입증 취지를 부인할 수 있다.
대장동 공판에선 녹음 당사자인 정 회계사, 녹취록을 작성한 속기사가 증인으로 섰다. 검찰과 이들은 "편집·조작하지 않았고, 녹음파일 그대로 녹취록을 작성해 증거능력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올해 5월 증거조사에선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무려 30시간이나 법정에서 녹음파일을 재생하기도 했다. 일부 피고인이 140시간 분량의 133개 파일 전체를 모두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증거능력을 문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재판부 재량으로 증거 채택은 유보한 상태지만, 이미 법관 앞에서 재생한 이상 증거능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녹취 식별 정도, 의도적 선별 가능성을 고려해 최종 판결 전에 증거능력 범위를 정할 것"이라며 "다만 녹취록의 증명력은 다른 증거가 가리키는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는지 따져야 한다"고 밝혔다.
남욱 '전언진술' 김만배가 인정해야 증거능력 있다?
대장동 공판은 남욱 변호사의 법정 폭로로 새 국면을 맞았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은 실소유주 논란이 일었던 천화동인 1호 지분 가운데 700억 원을 받기로 한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그러나 남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해 "천화동인 1호에 이재명 측(정진상·김용·유동규) 지분이 있다고 김만배씨에게 들었다"며 입장을 바꾼 것이다. 지분을 받기로 한 당사자가 유 전 본부장 외에 2명이 더 있었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남 변호사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가 김씨에게 '들었다'는 전언이란 점이다. 이로 인해 전문진술(제3자가 피고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한 법정진술)이기 때문에 증거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김씨 측이 "불명확한 기억에 의존한다"며 남 변호사 전언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 이유다.
하지만 형사소송법은 법정에서 법관 앞에서 한 진술은 정황상 신용도가 높다고 봐 증거능력을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해 김씨에게 '들었다'고 한 진술은 그 자체로는 증거능력을 갖는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김씨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은 다른 증인들의 진술이나 부합하는 증거가 있다면 증명력은 높아진다. 다만 김만배씨가 남 변호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 김씨가 이재명 대표 측에 '700억 약정'을 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남 변호사 전문진술의 증거능력 인정 범위에 대한 법조계 의견도 분분하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남 변호사의 법정 진술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증거능력이 있지만, 그 안에 포함된 전문 부분은 원진술자인 김만배씨가 인정해야 유죄 증거로 쓸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문장마다 증거능력을 판단하는 건 실무에선 불가능하다"며 "증명력 판단을 위해서라도 김씨 신문은 필요하고, 이미 법관 앞에서 진술한 이상 신빙성 문제만 남았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남 변호사 진술이 증거능력이 없다고 해도, 뚜렷한 물증이 많지 않은 상황이라면 판사 심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김만배씨 진술의 증명력을 낮출 수 있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법정에서 진술한 이상 재판부가 남 변호사 진술 자체를 완전히 배척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대립되는 진술과 비교하고 다른 증거와 증언을 종합해 신빙성을 판단한 뒤 최종 판결 전에 증거로 쓸지 가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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