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변호사 3만 명 시대라지만 수임료 때문에 억울한 시민의 ‘나홀로 소송’이 전체 민사사건의 70%다. 11년 로펌 경험을 쉽게 풀어내 일반 시민이 편하게 법원 문턱을 넘는 방법과 약자를 향한 법의 따뜻한 측면을 소개한다.
며칠 전 1년 차 신입변호사와 사건 관련 회의를 하다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법원을 통해 신청했던 상대방 은행계좌 등 자료를 분석하면서 돈의 흐름을 쫓는 과정인데, 은행 전산망에 저장된 자료가 그대로 추출되어 오다 보니 마치 암호를 해독하는 것 같이 느껴졌나 보다. 수십 통의 부동산 등기부등본까지 발급받아 거래의 정황을 추측해보며 얼추 해석을 마쳐갈 때쯤 후배가 말했다. "우리가 무슨 탐정 같아요." 맞다.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를 아무도 대신 찾아주지 않는다. 우리가 찾아야 한다." 기술적으로 해석이 안 되는 한두 가지에 대해서는 은행 회신담당자에게 전화로 물어보라고 하고 회의를 마쳤다.
재판은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제3자인 판사가 한다. 아무리 진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재판에서 아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그런데 증거가 충분치 않아 판사 입장에서 봤을 때 어떤 사실의 존재 여부가 모호할 경우, 누가 패소의 위험을 부담하느냐. 이것을 '입증책임'의 문제라고 한다.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검사는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증명력 있는 증거에 의해 판사를 설득해야 한다. 만약 그러한 증거가 없어서 판사가 공소사실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품게 된다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
반면 민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은 원고와 피고에게 각각 분배된다. 권리의 발생사실은 원고가, 권리의 소멸사실은 피고가 입증해야 한다. 대여금 소송이라면 돈을 빌려줬다는 증거인 차용증이나 계좌이체 내역은 원고가 찾아서 제출해야 하고, 돈을 갚았다는 증거인 영수증이나 계좌이체 내역은 피고가 찾아서 제출해야 한다. 만약 입증책임 있는 당사자가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패소의 위험을 안게 된다.
그런데 당사자에게 증거가 없는 경우도 많다. 꼭 필요한 증거임에도 자력으로는 확보할 수 없는 증거, 예컨대 상대방의 은행계좌내역이나 세금납부내역, 회사의 주주변동내역, 관공서 등 기관에 제출된 문서, 기관이 보유하는 각종 정보 등이다. 며칠 전 사건은 상대방의 은행계좌가 필요했는데, 자력으로는 구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때 판사에게 증거신청을 할 수 있다. 증거신청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금융기관에 대한 금융거래정보 제출명령 신청, ②과세관청에 대한 과세정보 제출명령 신청, ③관공서 등 기관에 대한 문서제출명령 신청이다. 개인정보보호가 더욱 철저해지고 있기 때문에 법원의 '명령'에 의해서만 확보할 수 있고, 스모킹 건이라 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 역시 이러한 절차를 통해 확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특정인이 특정 회사에 다닌 사실이 있는지 문제 된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대해 그 회사의 사업장가입자명부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신청을 할 수 있다.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비실명처리를 해서 회신을 해주는데, 소송에 현출된 다른 자료와 종합하여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다. 공동상속인 중에 상속세를 누가 언제 납부했는지 문제 된다면, 세무서에 대해 과세정보 제출명령신청을 할 수 있다. 임차인이 언제까지 전기세를 납부했는지 문제 된다면 한전에 사실조회신청을 할 수 있다. 개인정보가 특별히 문제 되지 않는 경우에는 법원 명령이 없어도 사실조회 신청만으로 가능하다.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소송에 필요한 각종 증거가 거미줄처럼 곳곳에 산재하게 되었다. 내 사건에 필요한 증거가 은행, 관공서 등 기관에서 어떤 모습으로 잠자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투망식 증거신청은 판사가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므로 왜 그 증거가 필요한지 입증취지를 명확히 해서 신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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