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왕 추적기: (상) 빌라왕은 누구인가]
부모가 사 준 빌라 날리고 2009년에 상경
화곡동서 중개보조원 하면서 빌라구조 눈 떠
부동산 상승기에 하루 두세 채씩 집중 계약
사망 수년 전부터 당뇨 등 각종 질환 시달려
경찰 수사 받다가 장기투숙 모텔에서 급사
편집자주
1,139채의 집을 가진 40대 남성이 죽었습니다. 상상도 못할 많은 집을 가진 이 ‘빌라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나 많은 집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걸까요? 한국일보가 빌라왕의 실체와 매수 수법을 추적하고, 이 사건에서 드러난 세입자들의 피해와 제도적 맹점을 연재합니다.
10월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모텔방에서 40대 중년 남성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망한 김모(42)씨는 두 달 넘게 이 모텔에 머물던 장기투숙객이었다. 당시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사인은 '상세 불명의 질병에 따른 병사'였다.
그러나 평범한 변사 사건으로 종결될 것 같던 김씨의 죽음은 그가 빌라 1,139채를 소유한 '빌라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김씨는 전세사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수도권 일대에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자를 양산한 김씨의 실체에 대해선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부분이 많지 않다. 김씨가 '무자본 갭투자'의 고수라는 소문, 명의만 대여해 준 '바지 주인'이라는 설, 그의 뒤에 전세사기 배후 세력이 있다는 추측까지. 여러 가설이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일보는 베일에 싸인 김씨의 정체와 그의 빌라 매수 수법을 상세히 추적했다.
①청년 시절: "집안 말아먹은 아들"
"남한테 욕도 못하는 순진해 터진 놈이야. 그냥 모자라서 집안 말아먹은 거야."
빌라왕 김씨의 부친
19일 한국일보가 김씨의 가족과 지인들을 상대로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김씨는 1980년 경기 연천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김씨의 아버지는 2년간 베트남에서 복무한 월남 참전용사 출신으로, 밭농사를 짓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김씨를 키웠다. 하지만 김씨는 학업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고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연천에서 의무경찰로 군생활을 마친 뒤 고시원 총무, 모텔 카운터 직원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뚜렷한 목표도 꿈도 없이 20대를 보냈다는 게 가족들의 증언이다.
부모는 성인이 되고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김씨 때문에 속이 탔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씨 부모가 소유했던 연천군 땅에 공단이 들어섰다. 김씨 부모는 토지 보상금 6억 4,000만 원에 대출을 더해, 양주시에 3층짜리 빌라(6세대)를 지어 김씨에게 양도했다. 모친 명의로 농협에서 대출까지 받아서 세운 건물이었고, 김씨 가족의 전 재산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불과 1년 만에 건물 한 채를 날렸다고 한다. 김씨 아버지는 "꼬임에 빠져 사채를 빌리는 바람에 1년 만에 (빌라를) 해먹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상경했다. 2009년 쯤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②상경 초반: 10만원 없어 돈 빌리던 중개보조원
"일을 빠릿빠릿하게 못했다고 해야 할까? 일머리가 없었지."
빌라왕 김씨의 지인 A씨
김씨가 상경 후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서울 강남의 부동산 중개소였다. 김씨는 이때부터 상업용 부동산 전문매매를 담당하는 중개보조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 공인중개사는 "부동산 시장은 중고차 시장처럼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거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김씨가 운영했던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2011년부터 고시원이나 원룸텔 등을 매매하기 위한 홍보 글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김씨와 함께 일했던 이들은 김씨를 "뛰어나진 않지만 성실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다. 외향적인 성격은 아닌 탓에 친구는 적었다고 한다. 김씨의 지인 B씨는 "좀 답답한 면이 있고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해 상사에게 혼나는 경우가 잦았다"며 "행색이나 말투가 그리 호감을 주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를 일했지만 김씨에게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다. 수완이 부족한 탓에 한 달 월급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모은 돈도 고시원 등 사업 실패로 모두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후반에는 당장 하루 생활비를 마련하기에도 벅찼다. 김씨의 지인 A씨는 "가끔씩 문자로 '10만 원만 빌려달라'는 부탁을 해올 때가 있었다"며 "같이 일할 때는 불쌍해서 집에 불러서 밥도 먹이고 했는데, 식사할 돈이 없어 주변에 돈을 빌린 것 같다"고 전했다.
③2019년 이후: 무자본 갭투자를 체득하다
김씨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2019년이었다. 당시 김씨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으로 근거지를 옮겨 중개보조원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상가 매매가 이전만 못하자 빌라 전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김씨는 당시 한 부동산업자에게 빌라 40채 가량을 '선물' 받으면서 '무자본 갭투자'의 세계에 눈을 뜬다. 말이 선물이지 사실상 전세사기의 명의대여자(바지)로 이용된 것이었다. 업계에 따르면 통상 신축빌라 분양업자는 명의대여자에게 빌라 한 채당 300만 원 내외의 뒷돈(리베이트)을 제공한다. 처음에 김씨는 공짜로 집을 받았다고 기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베이트도 받지 못하고 명의대여자로 이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마침 당시 부동산 시장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빌라 가격과 전세보증금이 급등했다. 앉아서 수 억 원을 벌어들인 김씨는 여기저기 명의를 빌려주며 전문적인 '바지 집주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유행하는 전세사기의 유형인 '동시진행'의 발원지가 강서구 화곡동이었던 만큼, 김씨는 일대에서 중개보조원으로 일하며 빌라 무자본 갭투자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학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생활비도 벌기 힘든 김씨 입장에서는 수백 만원의 리베이트를 챙기고 빌라 시세 차익 발생시 '플러스피'까지 받을 수 있는 바지 집주인은 '실패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분양팀 입장에서는 명의대여자가 전세보증금을 챙겨 도망가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 믿을 만한 '바지'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며 "김씨는 수차례 계약에서 신뢰성이 검증돼, 당장 명의자가 필요하면 무조건 '애니콜'인 김씨를 불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④전성기: 2년간 1,139채 사들인 비법
"수백 억대 화곡동 재벌이라고 자랑하고 다녔어요. 계약은 50돈 짜리 순금 도장으로 했고요."
김씨 지인 B씨의 증언
김씨는 이후 약 2년간 1,139채의 빌라를 무한 매집하기 시작했다. 신축 빌라를 팔아치우는데 집주인 명의가 필요했던 건축주와 분양팀의 수요를 노리면서,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 셈이다.
김씨는 본인 명의로 두 개의 법인을 설립, 사무장 한 명과 여직원 한 명을 두고 서울 강서구와 인천, 경기 일대의 빌라들을 사들였다. 인터넷 중개사이트에 '빌라 투자자'로 직접 광고까지 했다. 김씨의 종부세 체납액은 2020년 6월 기준 2억5,000만 원에서 지난해 6월 기준 62억 원으로 폭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미뤄보면 김씨는 2020년부터 집중적으로 빌라를 매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명의대여만 했지만, 나중에는 시세 차익을 노리고 일부 자기자본을 들여 빌라를 사들이기도 했다.
하루에 두세 건꼴로 진행된 계약(매매와 전세를 동시 진행)에는 여러 편법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을 대신 보내거나, 도장을 퀵 서비스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업계에서는 분양팀이 김씨 도장을 가지고 계약을 진행한 뒤 사후에 김씨에게 통보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⑤몰락: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럭비공'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녔어요. 차는 벤츠 마이바흐였고요."
전세사기 피해자 D씨
김씨는 이렇게 끌어모은 돈으로 유흥을 즐긴 것으로 전해졌다. 리베이트만으로도 거액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평소에도 술을 좋아해 일주일에 5회 이상 음주를 했다고 한다. 지인 A씨는 "소주는 별로 안 좋아했고, 맥주는 한 짝씩 마셔도 멀쩡할 정도로 정도로 술을 잘 마셨다"고 전했다. 씀씀이도 커서 명품을 사거나 최고급 수입차를 렌트해서 타고 다녔다.
다만 돈을 관리하는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부모 명의로 빌린 돈을 제때 변제하지 않아 연천군 본가는 내년 3월 경매에 들어갈 예정이다. 주변인의 만류에도 무자본 갭투자를 멈추지 않았다는 증언도 나온다. A씨는 "소유한 빌라 규모가 커지면서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며 "세금도 내고, 수습하라고 잘 아는 세무사를 소개해 줬지만 약속 당일 '귀찮다'며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말이 안 통하는 럭비공 같은 사람이었다"고 김씨를 평했다.
지난해부터는 종부세 체납, 전세보증금 미반환 문제로 소유한 빌라가 압류되는 상황에 몰렸지만 적극적인 대처에 나서지 않았다. 피해자 C씨는 "웃돈 4,000만 원을 주고서라도 빌라를 매입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김씨는 압류를 말소해 주지 않고 대신 밀린 세금을 내라고 협박을 했다"며 "돈 없으니 배째라는 식이었다"고 전했다.
⑥죽음: 부모 만난 지 5일 만에 주검으로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김씨가 급사함에 따라, 여러 의혹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김씨는 오랜 기간 당뇨를 앓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2018년 통풍을 앓고 한동안 한쪽 다리를 절기도 할 정도였다. 사망 직전에는 체중이 급격하게 늘고 차에 약봉지를 수북하게 싣고 다녔다는 증언도 있었다.
△많은 돈을 벌었으면서도 마지막 2개월을 모텔에서 지낸 점 △사망 5일 전 본가에 방문했던 점도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김씨는 평소 청각장애가 있는 어머니를 보러 매달 한 번씩 연천을 찾았다고 한다. 김씨는 10월 7일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김씨의 부친은 "특별한 징후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 아버지는 "못난 아들이 '요즘 사업이 잘 되고 있다'고 해 마음을 놓았는데, 결국 이 꼴이 됐다"며 한탄했다. 이어 "아들이 진 다른 빚 때문에 이 집도 결국 경매에 넘어갔다"며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500여명(카페 가입자 기준)으로 이뤄진 전세사기 피해자 모임은 김씨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허탈해 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고소로 김씨는 서울경찰청에서 수사를 받고 있던 중이었는데, 사망으로 인해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됐다. 경찰은 김씨 사망 이후 공범이 있는지 여부를 추가 조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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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섭섭지 않게 챙겨 줄게요"…전세사기 '동시진행' 다시 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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