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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유혹, 알쏭달쏭 외계어는 옛말...강력한 서사가 K팝을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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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유혹, 알쏭달쏭 외계어는 옛말...강력한 서사가 K팝을 살린다

입력
2022.12.21 16: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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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들. 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여자)아이들. 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시밭길 위로 riding / you made me boost up / 거짓으로 가득 찬 party / 가렵지도 않아 / 내 뒤에 말들이 많아 / 나도 첨 듣는 내 rival / 모두 기도해 내 falling / 그 손 위로 I'mma jump in’

그룹 르세라핌이 지난 10월 발표해 두 달 가까이 멜론 일간 차트 톱10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티프래자일’은 최근 K팝 가사 트렌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나의 추락을 기도하는 주위의 질투와 시샘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당당함과 자신감. ‘어제 본 영화에서처럼 날 안고 입맞추고 싶다고 말해봐’(핑클 ‘내 남자친구에게’)라며 남성 팬들을 유혹하던 과거 걸그룹들과는 천지차이다.

비슷한 시기 발표된 (여자)아이들의 ‘누드’도 마찬가지다. 세간의 편견을 깨주겠다는 듯 ‘누드’라는 단어를 통해 신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I don’t need no man(남자는 필요 없어)’ ‘다신 사랑받지 못한대도 / Yes, I’m a nude(그래, 나는 누드)’ ‘변태는 너야 / 아리따운 나의 누드’ 같은 가사로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한다.

자존감과 주체성을 주제로 한 서사가 K팝의 성공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성 팬을 대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후크송으로 귀를 자극하기 위해 의미 없는 외국어 가사를 남발하던 시대를 지나, 노래하는 가수들 자신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서사 구축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의 선봉에 있는 이들은 르세라핌을 비롯해 아이브, 에스파 같은 4세대 걸그룹들이다. 이들은 남성적 시각으로 만들어진 ‘청순’ ‘섹시’ ‘발랄’ 같은 이미지를 깨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서사를 만들고 있다. 남성 팬덤보다 여성 팬덤의 규모가 커지고, 곡 작업에 참여하는 멤버들이 늘면서 이 같은 변화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여자)아이들에서 총괄 프로듀서 역할을 하는 멤버 소연은 앨범 발표 당시 “‘진짜 사랑’을 찾으려 했고 결론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면서 “우리의 앨범이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말과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말했다.

걸그룹 뿐만 아니다. 그룹 멤버가 아예 솔로로 나서 자신의 이야기로만 앨범을 채우는 일도 늘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은 최근 자신의 첫 정규 솔로 앨범 ‘인디고’에서 예술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청년 ‘김남준’을 노래하고, 악뮤의 이찬혁은 ‘죽음 앞에서 찾은 진짜 나 자신’을 이야기한다. RM은 “그룹에서는 내 몫이 7분의 1 정도이고 작사에 참여하더라도 그룹의 서사나 콘셉트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면서 “언젠가 나만의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룹 방탄소년단 RM의 첫 정식 솔로 앨범 '인디고(Indigo)' 콘셉트 사진. 빅히트뮤직 제공

그룹 방탄소년단 RM의 첫 정식 솔로 앨범 '인디고(Indigo)' 콘셉트 사진. 빅히트뮤직 제공

가수들의 자의식을 담은 서사는 팬들과의 유대감과 몰입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예전엔 K팝 그룹 멤버들이 형식적으로 창작에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요즘엔 가사를 통해 가감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소통한다”면서 “이 같은 방식은 팬들과 유대감을 만들고 팬덤을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선 K팝 기획사들은 그룹의 서사를 강화하고 세련화하기 위해 유명 작가와 손을 잡거나 전담조직까지 두고 재능 있는 작가를 기용하고 있다. 르세라핌의 ‘안티프래자일’이 담긴 동명의 미니앨범 2집에는 ‘지구 끝의 온실’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초엽이 쓴 공상과학(SF) 판타지 소설 ‘크림슨 하트’의 프롤로그가 담겨 있다. ‘크림슨 하트’는 르세라핌을 모티브로 한 소설로 지난달 웹툰으로도 공개됐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쓴 정세랑 작가는 그룹 아이브가 지난 8월 공개한 영상의 내레이션을 썼다. K팝 그룹에 세계관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SM엔터테인먼트는 소속 가수들로 세계관을 만드는 SM 컬처 유니버스(SMCU) 프로젝트에 웹소설 작가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런 서사 구축은 음악 외에 서사 기반 창작물인 웹툰, 웹소설, 드라마, 영화 등으로 지식재산권(IP)를 확장해 사업성을 극대화하려는 시도와도 맞물려 있다. 스토리사업본부를 운영 중인 하이브는 방탄소년단, 엔하이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을 모티브로 한 웹툰을 잇달아 내놓으며 아티스트 관련 IP를 확장하고 있다. 지난 10월 브랜뉴뮤직도 카카오엔터와 손잡고 소속 그룹 유나이트 멤버 9명을 모티브로 기획한 채팅 소설 ‘원 포 나인’을 내놓았다.

그룹의 서사성이 음악 외적인 영역으로 확장하는 데 대해 팬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방탄소년단을 모델로 한 웹툰 '세븐페이츠: 착호'는 연재 전만 해도 이들의 팬덤인 아미 사이에서 웹툰 서사와 방탄소년단의 관련성이 떨어진다거나 방탄소년단을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일었으나 연재가 거듭되면서 잠잠해지는 분위기다. 독자 평점도 연재 초반이던 올 초 7~8점대에 머물렀으나 9월 이후로는 꾸준히 9.5점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하이브 관계자는 “웹툰이나 웹소설 등 오리지널 스토리는 아티스트가 선보이는 음악에 담긴 메시지를 서사로 풀어냄으로써 팬들에게 더욱 깊은 몰입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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