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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멂'도 관점" 시각 중심주의를 뒤집다

입력
2022.12.22 17: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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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저자가 쓴 신간 '거기 눈을 심어라'

장애인 출신 미국의 유명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 위키피디아 캡처

장애인 출신 미국의 유명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 위키피디아 캡처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1880~1968)는 마흔 살 때 보드빌(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노래와 춤 등을 엮은 쇼) 순회 공연을 했다. 그의 친구들은 깜짝 놀라 ‘비참한 연극 전시회’에 대한 충고를 쏟아 냈다. 보드빌이 천박한 쇼여서 성인과도 같은 켈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청각·시각 장애인인 그가 착취 당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켈러는 재정적 이유 때문에 보드빌 공연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오히려 ‘점잖은 체하는’ 기획자와 함께 한 순회 강연에서 켈러는 더 많은 사기를 당했다. 연단에 오르기 전 강연료를 요구했더니 청중이 화를 냈고 신문엔 ‘헬렌 켈러, 돈을 쥐기 전에 강연 거절’이라고 실리기도 했다.

신간 ‘거기 눈을 심어라’의 저자이자 공연예술가인 M.리오나 고댕은 이렇게 말한다. “착취라는 외침은 착취당하는 사람이 올바른 결정을 스스로 내릴 능력이 없다고 가정한다. 켈러는 보드빌에 출연할 무렵 탁월한 지성인이었고 완전히 성장한 마흔 살의 여성으로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자 역시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시각장애인, 그리고 사실상 모든 부류의 장애인은 감동을 주고 성스러워야 한다는 엄격한 주장의 피해자였다"라고 비판한다. 장애인을 위한 것 같은 주장도 실은 장애인 당사자가 배제된 비장애인의 관점이 지배적이란 얘기다.

저자는 첫 안내견과 만나기 전인 20대 때, 지팡이를 거부했다고 고백한다. 지팡이가 마치 낙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각장애인이 되면 많은 도전이 따르지만,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낙인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 뱅크

저자는 첫 안내견과 만나기 전인 20대 때, 지팡이를 거부했다고 고백한다. 지팡이가 마치 낙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각장애인이 되면 많은 도전이 따르지만,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낙인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 뱅크

특히 우리 문화에 시각장애인의 관점은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 책은 이를 '시각 중심 문화'라고 일컬으며,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보여준다. 사실 '시각 중심 문화'라는 말조차 비시각장애인들에게는 어색하다. 그저 시각장애인을 남달리 순수한 사람으로 이상화하거나 측은하게 여기기만 할 뿐이다.

시각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스테레오 타입을 향한 책의 고발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예컨대 저자는 텔레비전 광고를 찍을 때 감독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정말 흥미롭게 움직이시네요.” 그의 움직임이 기존에 묘사되어 왔던 시각장애인과 달랐기 때문이다. 저자는 "비시각장애 감독들은 계속해서 '눈멂'에 대한 고정관념을 창조하고 영속했다"고 꼬집는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눈먼 표정'도 비시각장애인들이 만든 이미지에 불과하다. 자신한테 말을 거는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는 시각장애인은 거의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거기 눈을 심어라·M.리오나 고댕 지음·오숙은 옮김·반비 발행·420쪽·2만 원

거기 눈을 심어라·M.리오나 고댕 지음·오숙은 옮김·반비 발행·420쪽·2만 원

저자는 병으로 서서히 시력을 잃다가 열여섯 살 즈음 보통 크기의 글자도 읽지 못했다. '봄'과 '눈멂'을 스펙트럼이라고 치자면 거의 모든 단계를 거쳐온 셈이다. 그런 그의 책은 '봄'과 '눈멂'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문학과 철학, 대중문화 콘텐츠 속 '눈먼 인물들'을 소환하며 새롭게 읽어낸다. 읽고 나면 "보는 것이 곧 지식이요, 보지 못하는 것은 무지"라는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된 생각이 잘못된 믿음임을, '눈멂'도 하나의 관점임을 깨닫게 된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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