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렀다지만 어떤 현실은 그대로다. 2022년의 마지막 날을 일주일 앞두고 2014년 10월 17일자 한국일보 칼럼 하나를 소개한다.
제목은 ‘세월호 6개월, 브레히트의 시’. 나치에 반대해 망명생활을 했던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시를 학생 등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와 엮어 풀어냈다. ‘세월호’라는 단어만 ‘이태원’으로 바꾸면, 마치 어제 쓴 글인 듯한 착각마저 든다.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로지 운이 좋았던 덕택에/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리고는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세월호 생존 학생들을 떠올리며 아픔에 공감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고통도 다를 리 없다. 죄 없는 사람의 죽음은 남은 자의 양심에 빚을 지운다. 홀로 목숨을 구했다는 미안함과 무력감에 마음이 산산조각 나고,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때도 지금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비극이 정쟁 도구로 전락한 것도, 진상규명을 호소하는 유족을 향한 혐오·막말도 판박이다. ‘참사 영업’ ‘시체팔이’ 같은 망언을 쏟아내는 정치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단 거짓말을 일삼는 정부 책임자에게 아이를 잃은 부모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또다시 브레히트의 시를 꺼내 든다.
상복을 입은 오세그의 과부들이/프라하에 와서 말했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주세요 여러분/오늘 아무것도 못 먹은 이 아이들을!/아이들 아버지가 당신들의 탄광에서 죽었으니까요.”/”어떻게 해보지”라고 프라하의 나으리들은 말했네/”오세그의 과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상복을 입은 오세그의 과부들이/경찰 무리와 부닥쳤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주세요 여러분/오늘 아무것도 못 먹은 이 아이들을!”/그러자 경찰 나으리들은 총알을 장전했다/”이렇게 하지”라고 경찰 나으리들은 말했네/”오세그의 과부들에게 이것이나 먹여 주지.”(브레히트 ‘오세그의 과부들을 위한 발라드’ 중)
나의 생명을 국가가 보호해줄 거라는 상식과 믿음은 또다시 깨졌다. 사고를 미리 감지한 시민들의 신고가 빗발쳤지만 철저히 무시된 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드러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시스템 부재 역시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아아, 조금은 개선됐을 거라는 생각은 얼마나 순진했는지.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받을 일이다/충고하노니/그대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 보는 사람을/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라/그대들이 현명하여/너무 믿을 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다.(브레히트 ‘의심을 찬양함’ 중)
나는 8년 전 글을 베껴 적었다. 그래도 의미가 통하다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세상인가. 그래서 우리 모두는 눈을 부릅뜨고 길을 걸어야 한다. 또 다른 암울한 미래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에게 말했다/”당신이 필요해요”/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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