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blo Milanes(1943.2.24~2022.11.22)
쿠바(Cuba)라는 국명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카리브해와 멕시코만에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리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이들은 현지 인디언 부족 아라와크(Arawak)의 말 ‘kuba(땅, 정원)’에서 나왔다는 설을 지지한다. 다른 부족 타이노(Taino)의 ‘쿠바나칸(cubanacan)’ 즉 ‘중간지대’라는 말이 어원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스페인 군대가 발을 들인 이래 남미- 북미로 향하기 전 머물던 중간 기착지가 쿠바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중시한다. 쿠바 문화, 특히 쿠바 대중음악의 다채로운 개성을 설명하는 근거 중 하나도 ‘쿠바나칸’이다. 스페인의 플라멩코나 볼레로 리듬과 사탕수수 농장 노예로 끌려온 이들의 아프리카 음악, 남미 음악 전통과 재즈 등 미국 음악의 창조적 퓨전을 가능케 한 배경이자 촉매가 그거라는 것이다. 근년의 살사부터 1999년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으로 세상을 사로잡은 쿠바재즈 열풍도 흔히 그렇게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20세기 쿠바 음악의 주요 변곡점으로 이념의 개입, 즉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을 외면할 수는 없다. 계급 착취와 차별의 역사 사회 문화를 전복하고 새로 구축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와 인간의 비전. 하지만 “쿠바인의 피에는 음악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경험하며 성장한 카스트로는 혁명 이념보다 뿌리 깊은 쿠바 문화(음악)의 힘을 얕잡아보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의 박정희 쿠데타 정권이 주문 생산 보급한 ‘새마을 노래(1972)’나 모든 음반에 의무적으로 삽입됐던 이른바 건전가요 같은 관제 문화로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수 없으리라 여겼다.
쿠바 혁명의 서막인 1953년의 ‘좌파 게릴라 무장투쟁(7.26 봉기)’ 즉 체 게바라 등 좌파 게릴라들이 주도한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산티아고 병영 습격이 실패한 직후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문화는 곧 교육’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요약하자면, 문화는 소수 엘리트의 것이 아니라 창작자와 모든 대중의 것이어야 하며, 문화 역시 인류 행복을 위한 사회적 생산의 일부이며, 혁신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촉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 혁명에 성공한 직후 그 사명을 떠안은 게 쿠바 혁명의 ‘여걸’ 아이데 산타마리아(Haydee Santamaria, 1922~1980)였고, 59년 4월 혁명의 문화 거점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Casa de las Americas)’를 조직했다. 혁명정부 주도하에 설립됐지만, 권력의 간섭 없이 빼어난 예술가들을 발굴-후원하며, 그들의 성장과 국제적 교류를 지원한 자율 조직. 쿠바 예술인들의 대모로 불린 산타마리아의 신념도 카스트로의 철학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혁명(이념)에 복무하는 음악이 아닌, 대중 모두가 흔쾌히 함께 누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거기서 60년대 말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 새로운 음악) 운동’이 시작됐고, 거기서 쿠바의 국민가수로 꼽히는 ‘욜란다(Yolanda)’의 파블로 밀라네스와 ‘유니콘(Unicornio)'의 실비오 로드리게스가 탄생했다. 또 그 덕에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등 70, 80년대 남미 좌파 혁명의 시대를 문화적으로 지탱한 연대의 힘이 비롯됐고, '생에 감사합니다(Gracias a la vida)’의 칠레 가수 비올레타 파라와 메르세데스 소사가 활동할 수 있었다.
‘누에바 트로바’ 운동의 주역으로, 20세기 쿠바 음악과 라틴 음악의 정체성을 재정립했다는 평을 듣는 음악인 파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es, 1943.2.24~2022.11.22)가 별세했다. 향년 79세.
밀라네스는 혁명 진앙지 중 한 곳인 쿠바 동부 오리엔테 주 바야모에서 피혁노동자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혁명과 더불어 10대 시절을 보냈다. 노래를 곧잘 불러 6세 무렵부터 지역 TV나 라디오 방송국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아오곤 했고, 7세 때인 1950년 가족과 함께 수도 아바나로 이주해 명문 아바나 시립음악원에서 클래식 작곡과 기악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를 매료시킨 건 거리의 대중음악, 특히 스페인풍의 경쾌한 선율에 아프리카풍 타악기 리듬을 섞은 쿠바 댄스음악 ‘손(Son)’과 미국 재즈가 가미된 발라드 ‘필린(Filin)’이었다. 그는 만 13세 때인 56년 첫 거리 콘서트를 여는 등 가수로서 혁명을 맞이했고, 혁명 후에도 이런저런 밴드에 소속돼 노래를 짓고 불렀다. 63년 그가 만든 첫 노래 ‘Tu mi desengano(그대, 나의 환멸)’는 자신을 버린 연인에게 결별을 고하며 새로운 연인에게 헌신적 사랑을 다짐하는, 다소 감상적인 재즈풍 발라드였다.
미국 플로리다로 망명한 바티스타 정권의 중상류층들과 달리 대다수 쿠바인은 혁명에 열광했고, 10대의 밀라네스 역시 혁명 정부의 대의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는 첫 앨범 ‘Mis 22 Anos(나의 22년, 1965)’을 발매한 직후, 자본-제국주의적 외국 음악에 대한 지나친 경도와 당시 미국 흑인들에게 인기 있던 아프로풍 헤어스타일 등이 문제가 돼 ‘병영강제노동수용소(UMAP)’에 끌려가 1년 반 가량 강제노역형을 살아야 했다. 일종의 사회주의형 인간개조 프로그램이었다.
61년 피그스만 침공과 이듬해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쿠바가 미국과 완전히 담을 쌓고 이른바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정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수용소에는 동성애자와 부랑자, 구체제 언론인과 종교-정치적 반체제인사 등 4만 8,000여 명이 수용됐고, 훗날 피델 카스토로는 UMAP를 혁명 초기의 과오로 공식 사과했다. 밀라네스 역시 “신체적 가혹행위는 없었지만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사탕수수 수확 노동을 해야 했던” 그 시기를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밀라네스는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붙잡혀 2개월여 옥살이까지 치른 뒤에야 산타마리아의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에 합류했고, 거기서 로드리게스 등 일군의 젊은 음악인들을 만났다.
1940~60년대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에서 시작돼 60, 70년대 밥 딜런, 존 바에즈 등으로 이어진 미국의 저항적 모던포크와 누에바 트로바 운동을 따로 떼어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저항적 반주류 모던포크와 달리 누에바 트로바의 음악은 가사에서나 선율에서나 이미 ‘이룬 자’들의 여유와 자신감에서 비롯된 시적 서정성이 돋보였고, 저항적이기보다는 지향적이었고, 지향에서도 ‘원수에 대한 적개심’ 류의 강박이 없었고, 연인에 대한 사랑의 고백조차 혁명과 라틴아메리카 민중에 대한 헌신과 지지의 문학적 알레고리로 표현될 수 있었다. 밀라네스가 두 번째 아내 욜란다 베넷과 1970년 첫 딸 ‘린(Lynn)’ 을 낳은 직후 아내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며 만든 노래 ‘욜란다’가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부부는 73년 헤어졌고, 밀라네스는 그 뒤로도 3번 더 결혼하며 매번 반려자에게 사랑 노래를 바쳤지만, ‘에테르나멘테 욜란다~(eternamente Yolanda~, 영원히 욜란다)’의 기도는 조국과 대륙, 인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알레고리로 지금도 뜨겁게 불리어지고 있다.
식민지 쿠바의 시인이자 문학적 영웅 호세 마르티(1853~1895)의 시편에 곡을 붙인 1973년 음반(Versos sencillos de José Martí), 73년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을 짓밟은 피노체트 군부쿠데타에 분노하며 그해 발표한 노래 ‘‘Yo pisaré las calles nuevamente’(나는 다시 거리에 나설 것입니다)’의 어느 선율에서도 ‘아름다운 해방광장 산티아고의 피비린내’를 감지하기 힘들다.
후덕한 체구와 편한 미소, 후줄근해 보일 만큼 편한 셔츠 차림으로 무대에 오르곤 하던 밀라네스는 형제처럼 지낸 로드리게스 등과 함께 평생 50여 개의 싱글- 합동 음반과 수많은 노래를 발표하며, 70년대 이후 대륙과 스페인어권을 넘어 적국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젊은 날 그를 가두었던 피델 카스트로는 1984년 그들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며 “당신들의 성취가 곧 혁명의 성취”라 말하기도 했다.
밀라네스는 자신을 “노래 노동자”라 소개하곤 했다. “쿠바의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제일 잘 알고, 또 내 방식대로 해낼 수 있는 게 노래여서 노래를 짓고 부른다”며, “나는 내가 살아온 이 땅의 현실과 혁명의 가치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 병석의 피델 카스트로가 권력을 동생 라울(Raul)에게 넘긴 직후에도 쿠바의 여러 예술인 지식인 등과 함께 새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 천명했다.
미국의 62년 쿠바 봉쇄 이후 대체로 그랬지만, 1990년대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소련의 원조가 끊기면서 쿠바인들의 삶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살인적인 실업률과 식량난, 원자재 및 연료 부족사태… 플로리다에 터를 잡은 쿠바 망명자들이 주축이 된 집요한 대 쿠바선전방송은 쿠바인들에게 미국이라는 적과 ‘배신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더불어 미국적 자유와 풍요의 갈망을 함께 부추겼다. 80년대 중반 이후 수많은 이들이 합법-불법으로 플로리다 해협을 건넜다. 쿠바 정부도 93년 미국 달러 사용과 소규모 식당 등 자영업을 합법화하는 등 자본주의적 개혁을 시도하며 캐나다와 스페인 관광자본 유치에 나섰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체제 수호를 위해 견제와 억압의 고삐를 죄었다.
2003년 쿠바 정부는 독립 언론인 등 반체제 인사 75명을 투옥했다. 투옥을 면한 일부가 그해 4월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여객선을 납치, 승객 50여 명을 인질 삼아 미국 망명을 시도하다 쿠바 보안군에게 체포된 일이 있었다. 미 국무부와 국제사회는 쿠바 정부의 정치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미국 망명자들의 반 쿠바 여론전도 한층 가열됐다. 그 와중에 일군의 쿠바 지식인과 예술인이 반체제 인사 구속과 납치 용의자 처형을 지지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서명자 중 한 명이 실비오 로드리게스였고, 반대자 중 한 명이 밀라네스였다.
공연차 미국에 체류 중이던 밀라네스는 현지 언론 인터뷰와 쿠바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60년대 자신의 강제수용소 경험을 언급하며 “나는 우리의 혁명이 그 시절의 과오를 반복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혁명이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다른 혁명들과 달리 정체되지 않고 더 성숙해질 수 있도록 싸워왔다. 그래서 나는 침묵하지 않고 용기를 내 겁쟁이들 앞에서 주장해왔다. 자칭 ‘진정한 혁명주의자들’의 오류와 극단주의 때문에 이제 잃게 된 내가 꿈꾸던 나라, 내가 꿈꿀 수 있게 해준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겁쟁이 중에는 로드리게스도 포함돼 있었다. 로드리게스는 조국과 혁명을 사수하기 위해 서명에 동참했다며, ‘이라크 다음은 쿠바’를 외치며 쿠바 정부 전복을 획책하는 마이에미의 ‘마피아 미디어’에 편승한 밀라네스를 비롯한 ‘변절자’들을 비난했다. 그는 “쿠바를 전복시키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이들의 소굴에서 우리 재판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며, “그들이 말하는 영광은 진정 자기 민족을 존중하는 이들의 품위와 양립할 수 없는 굴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밀라네스는 만성 신장 질환 치료를 위해 2004년 스페인으로 이주한 뒤 쿠바와 멕시코, 스페인을 오가며 지냈다. 그는 2010년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쿠바 지식인들의 단식투쟁에 동조하며 “늙은 지도자들의 낡은 의식”을 비판했고 “역사는 새로운 사상과 인물들과 더불어 전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울의 자본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며 “더 과감한 개혁과 더 폭넓은 자유를 보장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80년대 말부터 소원해지기 시작했다는 ‘누에바 트로바’의 두 선구자의 공개적인, 극단적인 불화를 쿠바 시민들은 착잡한 심경으로 지켜봐야 했고, 일부는 ‘파블로파(Pabloists)’와 ‘실비오파(Silvistas)’로 나뉘어 더러 비열한 어조로 상대를 비난하기도 했다. “둘 다 쿠바 혁명을 위해 평생을 바쳤고, 둘 모두 혁명을 포기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의 불화를 상업적인 문제나 질투로 폄하하는 것은 걸출한 두 예술가에 대한 모독”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물론 있었다.
밀라네스는 2004년 결혼한 다섯 번째 아내인 스페인 사학자 난시 페레스(Nancy Perez)의 신장으로 2014년 이식수술을 받았고, 2017년 이후 혈액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노래를 계속했다. 쿠바 정부 역시 그의 고국 공연을 불허하지 않았다. 그는 숨지기 5개월 전인 지난해 6월 휠체어를 타고 아바나의 대형 공연장 무대에 올라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감동적인 무대를 선사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콘서트였다.
라울 카스트로의 후임인 현 쿠바 주석 겸 공산당 제1서기 미겔 디아스카넬(Miguel Diaz-Canel, 1960~ )은 SNS로 “밀라네스는 우리 세대의 사운드트랙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가수”라 썼고, 수많은 시민들은 ‘욜란다’의 가사 한 구절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당신이 나를 그리워하는 한 나는 죽지 않을 것이며,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당신이 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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