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권리” vs “인권” 거듭된 신상공개 논란의 역사
아무도 못 알아보는 증명사진이 논란 불씨 키워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지적도
“본인이 원한다고 저런 보정된 옛날 사진을 공개하다니, 흉악범 인권이 우선인가요?”
“이미 구속된 피의자인데 ‘머그샷’을 공개한들 사람들 속이 시원한 것 외에 실익이 있을까요?”
전 동거 여성과 택시 기사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기영(31)의 사진 한 장이 신상공개 제도 실효성 등에 대한 공방을 가열시켰다. 이기영 본인이 최근 모습이 아닌 증명사진 공개를 고집한데다, 마스크를 벗는 일도 거부한 것이 알려지면서 절차상 ‘당사자 의사’가 중시된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피의자나 범죄자의 초상권 등 헌법상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돼야 할까? 신상공개 제도는 어떤 논란 속에 언제 어떻게 등장했을까? 공개 여부, 방식, 범위, 절차 등에 이르기까지 격론이 거듭된 논란사(史)와 다섯가지 주요 쟁점을 돌아 봤다.
시작은 미성년 대상 성범죄자
국내에서 피의자 및 범죄자 신상공개의 찬반론이 본격 맞붙은 것은 2001년 무렵이다. 앞서 일괄 기준 없이 당국이나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던 피의자 및 범죄자 신상정보는 2000년대에 들어서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며 비공개 방침이 통상 기준으로 여겨졌다.
다만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에 관해서는 분위기가 달랐다. 성범죄 전반이 뿌리 뽑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문제까지 심각해지자 신상공개제를 골자로 한 청소년성보호법이 마련됐고, 2000년 1월 국회를 통과했다. 국무총리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이를 토대로 이듬해 8월 30일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자 169명의 신상을 인터넷과 관보, 전국 16개 시도게시판 등에 최초 공개했다. 주소는 시군구 단위까지만, 직업은 회사원 등으로 광범위하게 분류되는 방식이다.
당시 반대론자들은 이중처벌, 인격에 대한 사형 선고 등을 언급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여론의 70% 이상이 찬성 의견이었다. 오히려 동명이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직업과 주소를 보다 자세히 기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당시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사회단체들은 집회를 열고 “피해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기는 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형이 확정된 사람은 모두 신상을 전면 공개해야 한다”며 보다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다. 이후 2차 공개와 소송전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법률가들의 ‘성범죄자 신상공개’ 지지 선언이 이어지기도 했다.
2003년에는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자 신상공개가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오면서 논란이 일단락됐다. 4차례에 걸쳐 대상자 1,926명의 명단이 공개된 상태였다.
사진과 세부주소 공개가 검토된 것은 2004년부터다. 미성년 대상 성범죄 가해자 중 상당수가 상습범인데다, 공개 이후에도 재범을 저지른 사례까지 나오면서다. 1996년 제정된 미국의 메건법(Megan's Law)을 참고한 강화 입법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논의가 가열되자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성폭력범 정보를 주소ㆍ사진까지 확대하는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에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쟁점① 공개 해? 말아?
이 같은 찬반 격론은 상당 기간 지속됐다. 하지만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이나, 이웃 초등학생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하고 불태워 유기하는 등 충격적 범행이 끊이질 않자 조치 강화 요구는 거세졌다. 특히 신상공개 조치 후 2006년 성범죄 발생건수가 3년만에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 신상공개 강화 여파로 풀이되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형이 확정된 성범죄자 신상은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공론이 형성된 것이다. 단순 신상은 물론 구체주소, 얼굴공개, 전자발찌 등 처벌 및 관리 강화 방안도 쏟아졌다.
앞서 기자회견과 관보 등록 등으로 공개되던 방식은 2008년 2월 개정 청소년성보호법이 발효되면서 관할 경찰서에서 법적 처벌 절차가 종료된 성범죄자 신상을 열람할 수 있도록 변경됐다. 이후 열람 방식이나 범위의 한계 등이 꾸준히 지적되면서, 2013년 6월 이후로는 일부 단순 성매매 등을 뺀 모든 성범죄는 유죄판결 후 신상등록을 해야 하며 공개 여부는 법원이 판단한다. 공개 정보는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에서 열람 가능하며, 공개 대상자는 1년마다 새로운 증명사진을 내야 한다. 성범죄자의 전출입시 인근 주민에게 우편고지도 이뤄진다. 적어도 성범죄에 관해서는 신상공개가 당연시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쟁점② 범죄자만? 피의자도?
성범죄 외 흉악범을 포함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 신상공개는 한결 더 복잡한 논쟁을 통과했다. 2000년대 후반까지도 국민 관심도에 따라 공분 속에 곧바로 이름이 언론을 타는 경우와 끝내 A씨, 정모씨 등으로 남는 경우가 뒤섞인 상태였다. 논쟁에 본격 불이 붙은 것은 2009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면서다. 공개하는 매체와 아닌 매체가 나뉘었고, 전문가들 입장도 엇갈렸다.
공개 측은 범죄의 사회적 해악을 고려해 얼굴 공개가 경각심 제고 등의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봤고, 비공개 측은 사진 공개에 따라 얻을 공익과 이를 위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을 둘러싼 국민적 합의가 아직은 충분치 않다는 입장이었다. 무죄추정원칙도 거론됐다. 자백이 나왔어도 모든 변수가 사라진 것은 아닌데다 수사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의 공개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 외의 효과가 있는지 등에 대한 격론이 오갔다.
쟁점③ 오히려 공개수배 때나 필요?
2009년 국회 입법조사처 역시 `피의자 및 용의자 신상공개에 대한 법적 검토보고서'에서 "경찰은 피의자의 공개수배 등을 제외하고는 피의자 얼굴을 공개할 수 없도록 돼 있다"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검토의견을 내놨다.
오히려 공개 수배의 경우 추가 범행을 막기 위한 급박한 조치로 실명과 몽타주 등을 공개하는 데 이견이 없지만, 이미 구속된 피의자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헌법에 무죄 추정 원칙이 명문화 돼있는 데다 △사진 공개가 가족에게 정신적 피해를 초래할 경우, 헌법상 자기책임의 원칙이나 연좌제 금지 원칙을 위반할 가능성이 문제가 됐다.
이런 가운데 수사가 진행 중이라도 흉악범 얼굴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2010년 4월이다. 당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시행됐고, 법무부는 흉악범에 한해 수사 중이라도 얼굴과 신상정보를 언론에 공개할 수 있도록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개정하고 나섰다.
이후 오원춘, 안인득, 고유정, 이춘재, 전주환 등의 실명이 모두 공개됐고,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착취 동영상을 찍은 뒤 텔레그램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신상이 공개된 것도 이 같은 피의자 신상공개 효과였다.
이후 공개 기준이 지역마다, 사례마다 제각각이라는 지적이 이어지자 2021년에는 경찰청 인권위원회가 ‘피의자 얼굴 등 신상공개 지침’ 개선안을 마련해 각종 기준을 정비했다. △범죄 예방과 수사 상 목적이 있는 경우에 한해 최소한 범위에서 신상을 공개하고 △신상공개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피의자에게도 의견진술 및 소명 기회를 부여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쟁점④ 흉악범 동의를 왜 받아?
이기영 사건에서 많은 이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렇게 ‘피의자에게도 의견 및 소명 진술 기회’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경찰청 인권위가 지목한 것은 △낙인 효과 △재사회화에 끼치는 악영향 △가족 및 지인의 피해 △인격권 등이다. 2021년 당시 개선안 권고 결정문은 “한번 언론 등에 신상이 공개되면 유죄 확정 여부와 무관하게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만큼 신상공개 필요성이 인정되더라도 헌법상 적법절차 원칙은 준수돼야 하는만큼 체포돼 구속 송치되기까지 물리적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의 의견과 소명자료를 신속히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신상공개 때는 피의자 가족이 입는 피해도 부인할 수 없는데, 이 대목이 위헌 논란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크다는 점도 ‘제한적 공개’의 근거가 됐다. 경찰청 인권위는 “우리 헌법이 연좌제를 공식적으로 금지했지만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신상이 공개되면 피의자의 명예는 물론 그 가족과 친지, 친구 등의 피해도 자명하다”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2차 피해 방지 가이드라인’을 제작 등도 필요하다”고 했다.
쟁점⑤ 효과는 있는 거야?
무엇보다 당시 경찰청 인권위는 효과 측면에 방점을 찍었다. 신상을 공개했을 때, 인격권, 초상권은 크게 제약하는데 비해 실제 형 집행 후 과연 사회 복귀나 재사회화를 돕는데 효과가 있을 것이냐는 의문이다. 오히려 이를 곤란하게 해 재범 가능성만 키운다는 우려다. 당시 권고문은 “일반예방 측면에서도 국내외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시행된 피의자 신상공개를 통해 사회안전망이 나아졌음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자료나 근거를 찾기 어렵다”며 큰 예방 효과 기대에는 선을 그었다.
지난달 경찰청 인권위원장에 위촉된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3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단순하게 국민의 호기심만 가지고 얘기하긴 곤란한데다 기준 자체가 추상적인 면이 있다”며 “넓게 얘기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넓게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이 공개가 이뤄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소위 머그샷을 공개하려면 별도의 법률적인 근거가 필요한 상황인데 획일적으로 적용하려 들수록 위헌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개가 가져오는 경고 효과를 부정할 수 없는만큼 효과에 대해서도 여전히 이견이 오간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2020년 '성범죄자 신상공개고지 제도 효과성 제고를 위한 법제정비 방안' 연구에서 "범죄자 신상을 공개하고 고지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피해 예방과 재범 방지"라며 "이에 용이한 방식인지에 대한 개선 방안이 끈임없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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