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에 '칭찬'과 '밝은 기사' 주문
권력감시·사회고발 약화로 이어져
사회적 불행 폭로 기자들 독려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난해부터 언론계의 이슈 중 하나는 대주주가 바뀐 뒤에 사내에서 여러 갈등이 있었던 한 언론사 기자들의 이직 러시이다. 작년 6월 해당 언론사 기자 56명은 그들이 맞이하게 된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한 성명서를 냈고, 그중엔 “칭찬하는 신문을 만들자”는 경영진의 발언에 대한 비판 문구가 들어 있다.
기자라면 바로 이해한다. ‘칭찬’을 주문하는 것은, 권력감시를 제대로 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을. ‘칭찬하자’는 ‘비판하지 말라’를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나도 기자생활 동안 몇 번 들어봤다.
‘칭찬하자’가 변주된 유의어로 ‘밝은 기사를 쓰자’가 있다. 지난해 후배 기자 한 명은 조현병을 가진 환자가 폐암 진단을 받았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사연을 담은 기사를 게재한 뒤, 예상치 못한 반응을 듣고 당황해했다. “눈물 말고 웃음을 줄 만한 기사를 보고 싶다”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최대한 이해력을 동원해서 해석하자면, 이런 제안들이 “권력 비판을 하지 말라” “사회문제를 고발하지 말라”라는 신념에 찬 의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 수 있다. ‘밝은 기사’에 대한 열망은 사실 상당히 흔하고 유서 깊다. 오래전 학창시절, 한 친구는 “아빠가 그러는데, A신문(비판 언론)을 보지 말고 B신문(친정부 언론)을 보래. 세상을 밝게 봐야 한대”라고 말했다. 지금은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이 적지만, 한때는 출근 전 펼쳐 보는 조간신문 기사들이 아침 밥맛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러나 밥맛 좋아지는 기사가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단순한 의도라고 해도 결과는 같다. “기분 좋은 기사” “칭찬하는 기사”를 쓰라는 주문은, 사회의 비극을 찾아 현실을 고발하려는 기자의 의지와 그 발걸음을 멈칫하게 한다. 돌봄 부재 속에 사망한 조현병 환자에 대한 기사를 쓴 기자에게 “밝은 걸 쓰라”는 주문은, 그런 환자가 죽건 말건 상관없다는 결론과 닿아 있다.
한국은 이미 즐거운 것, 힙한 것, 부유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이 노출되고 찬양받는 사회이다. 시대적으로 슬픈 것, 우울한 것, 약한 것, 어려운 것에 대한 심리적 멸시가 크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따르면, 공감에 실패한 사람은 본인도 불쾌해진다. 개인의 이익이 최우선이다 보니, 다른 사람이 겪는 슬픔이나 차별에 대한 공감이 떨어지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 없는 사회고발성 기사에서 오히려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설사 어쩔 수 없이 그런 감정이 든다고 해도, 언론의 영역에까지 ‘기분 좋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진심으로 심사숙고해야 하며 가능한 한 하지 말아야 한다. 즐거움과 밝음의 추구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영역으로 충분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전국 신문사는 5,397곳(인터넷 매체 포함), 취재기자는 1만8,742명에 이른다. 아무래도 권력·자본친화적인 환경이 강하다 보니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두고, 여러 불합리한 제도 개선을 꾸준히 촉구하는 기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속한다. 독려는 못할지언정, 이들마저 기를 꺾을 일은 아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불행한 기사’와 ‘행복한 기사’는 객관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주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크고 작은 사회적 불행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문제를 ‘기사 가치’로 봐주는 기자의 그 시선에서, 정성스럽게 써준 몇 줄의 기사에서 위안을 얻고 잠시의 행복을 누릴 것이니까. 이런 이유로 불행의 구조를 보여주고 폭로하는 기사가 때로는 가장 ‘행복한 기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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