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기후 전문가 5명의 '겨울 더위' 분석]
유럽의 이번 겨울은 이상스럽게 따뜻하다.
새해 들어 곳곳의 기온이 섭씨 20도를 넘기면서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를 입는 대신 옷을 벗고 일광욕을 즐겼다. 일찍 핀 봄꽃 때문에 '꽃가루 주의보'가 내려진 지역도 수두룩했다. '눈이 녹아 초록 풀밭을 드러낸 한겨울의 알프스'는 이상기후의 정점이었다. 스키·스노보드 대회를 비롯한 눈 축제가 줄줄이 취소됐다.
한국일보는 '겨울 더위'의 실태, 심각성, 대비책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각국 기후 전문가 5명을 인터뷰했다.
①유럽연합(EU) 산하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C3S)'의 카를로 부온 템포 이사와 ②프레자 밤보르그 선임 연구원 ③유엔 산하 조직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 소속 비르기트 베드나르 프리들 그라츠대 교수와 ④에리카 코폴라 국제이론물리학센터 박사 ⑤옥스퍼드대 환경변화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한 프리데리케 오토 런던 임패리얼 컬리지 선임 강사 등이다.
이들은 "'겨울 더위'는 조용하게 인류를 파괴 중"이라고 입을 모아 경고했다. 더워진 겨울 공기는 폭우와 홍수 같은 재해를 일으킨다. 생태계 질서도 영구히 무너뜨린다. 산업도 타격을 입는다.
문제는 '더운 겨울'이 올해만의 현상이 아니며,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겨울철 이상 고온은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이제는 '뉴노멀'로 인식하고 대비책을 전면적으로 짜야 한다"고 지적했다.
"올해 유럽 겨울, 기록적 더위" 한목소리 '우려'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들은 "겨울이 끝나지 않아 이번 이상기후를 정확하게 분석할 순 없겠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현상만으로 충분히 극단적"이라고 말했다.
템포 이사는 이상 징후가 연말부터 관측됐다고 짚었다. △12월 초 유럽 대륙 북서쪽 지역이 지나치게 추웠고 △12월 말엔 유럽 남서쪽을 중심으로 기록적 더위가 관찰됐다.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C3S)는 지난해 9월부터 "더운 겨울이 닥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더위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엔 별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유럽의 더운 겨울이 발생한 원리는 이렇다. "남서쪽의 더운 공기가 벨라루스(러시아 서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까지 강하게 도달했고, 대기가 맑아 대륙이 더운 공기에 쉽게 가열됐기 때문이다."(밤보르그 연구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지구상의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지구 온난화다. C3S는 지구가 산업화 이전보다 1.2도 뜨거워졌다고 보고했다. 유럽 대륙은 다른 대륙보다 더 빨리 뜨거워지는 중이다. 세계기상기구(WMO)는 1991년부터 2021년까지 지구 온도가 10년마다 0.2도씩 올랐는데, 유럽은 0.5도 올랐다고 지난해 11월 발표했다.
"관광 산업 타격이 끝? 천만에"… 인류에 위협 '줄줄이'
겨울 더위의 피해가 가장 먼저 미치는 분야는 관광 산업이다. 알프스의 스키장과 숙박업소들이 줄줄이 문을 닫은 것이 단적인 예다. 프리들 교수는 "온화한 겨울이었던 2006~2007년, 2010~2011년에 프랑스의 스키 관광객은 12~26% 줄었다"고 했다. 인공 눈으로 스키장을 운영할 수는 있지만, 수익성이 떨어지고 환경을 파괴한다.
관광 산업의 피해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전문가들은 "겨울 더위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을 더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더운 공기가 대기를 가열해 예기치 않게 폭우가 쏟아지면 인류는 준비 없이 겨울 홍수를 겪어야 한다. 얼어서 눈으로 내려야 할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리면 빙하는 더 빨리 녹는다.
더운 겨울은 기근을 유발할 수도 있다. 농작물 수확량에도 타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기온이 높아지면 식물은 봄이 왔다고 착각하고 싹을 일찍 틔운다. 다시 기온이 내려가면 발아한 식물은 성장을 멈추거나 죽는다. 오토 강사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농작물 수확에 차질이 생기는 주된 이유도 너무 일찍 싹을 틔운 탓에 식물이 서리에 취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물 다양성도 불가역적으로 해친다. 오랜 진화를 거치며 낮은 겨울 기온에 적응한 동·식물의 생존이 불가능해지거나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템포 이사는 "인간의 생체도 기후에 적응하고 의존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며 "더운 겨울은 인간의 활동과 건강에 연쇄적,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더운 겨울의 영향은 유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상기후의 피해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 대응 능력이 낮은 개발도상국과 열대 지역 국가들은 존립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계속된다"… '겨울 더위' 보는 시선 '싹' 바꿔야
전문가들은 "유럽의 이번 겨울이 확실히 이상하지만, 이번 겨울만 이상한 건 아니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코폴라 박사)고 강조했다. 실제 2018~2019년, 2010~2011년, 2006~2007년 등 '온화한 겨울'이 자주 나타났다. 시간이 갈수록 더 더워졌고, 더위의 영향을 받는 지역도 더 늘었다.
"불행한 진단이지만, 단기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템포 이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가 조상 세대와 다른 기후·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위기관리 방식을 전반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라고 했다. 겨울 더위를 상시적인 현상이자 심각한 징후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져야만,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효과가 입증된 장기적 해결책은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눈이 녹아 사라진 알프스에서 16일(현지시간)부터 열리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만 봐도 그렇다. 다보스포럼은 매년 1월 국제사회 지도자들이 모여 '가장 중요한 이슈'를 논하는 자리로, 기후위기 역시 주요 주제로 다뤄진다. 올해 포럼도 예외 없이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날아온 인사들로 붐비고 있다. 지난해 포럼 기간(일주일) 동안 다보스 지역에서 개인용 제트기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자동차 35만 대가 배출한 양과 같았다(네덜란드 환경컨설팅 회사 CE델프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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