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반제회의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기본계획이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근교 반제(Wannsee)의 한 별장에서 수립됐다. 나치 친위대(SS) 초대국장으로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만든 제3제국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904~1942)가 주재한 이른바 ‘반제회의’였다.
1933년 집권 이후 유대인 고립-차별-노동수용소 수용정책을 펴온 나치의 반유대 정책은 2차대전 발발과 유럽 석권 이후 한계에 봉착했다. 나치 박해를 피해 다수가 망명하면서 독일 내 유대인은 통제 가능한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유럽 전역, 특히 유대인 정체성을 완강하게 지켜온 동유럽과 500여만 명의 소련 유대인이 현안으로 떠올랐다. 나치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을 마련해야 했다.
소련과의 동부전선 전투가 장기전 양상으로 전개되자 히틀러는 제3제국 2인자였던 제국원수 겸 국방위원장 헤르만 괴링을 통해 하이드리히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괴링은 1941년 7월 하이드리히에게 보낸 공문으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한 조직적 재정적 기술적 수단을 포함한 종합계획을 이른 시일 내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반제회의에는 당시 게슈타포 소장 하인리히 뮐러와 친위대 지역본부장, 법무부와 내무부 등 관계부처 책임자 10여 명이 참석했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만, 조부모 4명 중 2명 이상이 유대인일 경우 1급 유대인으로 분류하자는 등의 기준도 그 회의에서 마련됐다. 방안 중에는, 집단 불임시술을 시킨 뒤 마다가스카르섬에 수용하자는 안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론은 수용소 집단 멸절이었다. 회의 직후 폴란드 헤움노(Chelmno) 수용소 ‘독가스’ 실험으로 ‘경제성’과 ‘효율성’도 확인했다. 반제회의 회의록에는 ‘멸절(Vernichtung)’이란 낱말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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