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칠곡 약목면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 관호산성, 왜관철교
경북 칠곡 기산면에 ‘말하는 은행나무’가 있다. 비룡산 아래 각산마을에서 약 500m 떨어진 대흥사라는 작은 암자 앞이다. 잎 하나 남지 않은 겨울이지만 1,000년 가까이 됐다는 나무의 풍채가 위풍당당하다. 그런데 나무가 어떻게 말을 한다는 걸까? 옛날 인근 성주에서 퉁지미(각산마을)로 시집온 새색시가 이 나무 아래서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았고, 이후 마을 사람들도 남에게 말하기 힘든 속내를 은행나무에게 털어놓았단다. 그럴 때마다 은행나무는 꿈에 가장 사랑하는 가족으로 나타나 위로하고 해결책을 말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각색된 부분을 덜어내면, ‘말하는 은행나무’의 실상은 ‘말 들어주는 은행나무’였다. 낯선 산골로 시집온 새댁이 맘 놓고 하소연할 존재가 이 나무밖에 없었던 셈이다.
팔십 줄에 오지게 재미있게 '칠곡가시나들'의 유쾌한 인생살이
‘말하는 은행나무’가 뿌리 내린 비룡산 너머는 약목면이다. 면 소재지를 가로지르는 두만천 주변에 알록달록 화사하게 단장한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가 있다. 읍내에서도 가난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천변의 낮은 집과 담장을 따라 여든이 다 돼서야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의 시화가 그려져 있다. 퉁지미 새댁처럼 한평생 며느리로, 또 여성으로 겪었을 고초가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 그들의 시는 배우는 기쁨, 가족과 지인에 대한 고마움, 꽃다운 시절의 두근거림을 담고 있다. ‘칠곡가시나들’은 2019년 개봉한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시는 굳이 표준어로 옮기거나 교정을 보지 않고 처음 쓴 그대로 적었다. 경상도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일상에 살아 숨 쉬는 입말이어서 더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야야 와 그래 차를 세우노. 엄마요 앞에 더디 걷는 할매 보이 엄마 생각이 나네. 우리 엄마도 저래 걸어가겠지 싶어서 빵빵 거리도 몬하고. 딸이 그 말을 하니 내 눈에 눈물이 난다.
강금연(86)
비가 오연 혼자 있으까, 쓸쓸하고 허전하고 집이 텅 빈 거 거꼬, 그때는 아들한테 전화해 본다. 오이야 하고 나면 눈물이 난다.
이원순(85)
마당에 도래꽃이 만타. 영감하고 딸하고 같이 살던 우리집 마당에 도래꽃이 만타. 도래꽃 마당에 달이 뜨마, 영감 생각이 더 마이 난다.
박두선(87)
우리 손녀 다 중3이다. 할매 건강하게 약 잘 챙겨 드세요. 맨날 내한테 신경 쓴다. 노다지 따라 댕기면서 신경 쓴다. 이뿌고 귀하다.
박월선(88)
우리 며느리가 공부한다고 자꼬 하라칸다. 시어마이 똑똑하라고 자꼬 하라칸다.
곽두조
고민을 거듭하며 짜낸 시어마다 가난하고 못 배워 서러웠지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지난날의 따스한 추억이 묻어 있다. 총천연색 그림과 맞춤법을 무시한 언어 구사에 미소를 짓게 되지만, 돌아서서 곱씹을수록 울컥하는 속울음을 삼키게 하는 문장이다. 행간마다 먼저 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 자식 걱정과 며느리 자랑, 손주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밴 때문이리라. 설 밑이어서 더욱 뭉클하다.
200m 벽화에 담긴 시는 약 10편에 불과하지만, 칠곡가시나들의 작품은 총 1,500여 편에 달한다. 2006년부터 평균 연령 78세 할머니 400여 명이 칠곡군에서 운영하는 마을학당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가슴속 깊이 꼬깃꼬깃 숨겨 두었던 지난 삶의 이야기를 엮은 글들은 ‘내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 ‘작대기가 꼬꼬장 꼬꼬장해’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시가 뭐고?’ 등 총 8종의 시집으로 출간됐다.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에서 한 발짝만 들어가면 약목면 중심이다. 약목전통시장부터 좁은 2차선 도로 양쪽으로 마트 약국 다방 채소가게 등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다. 풍족하지 않지만 없는 것 없고 정감 넘치는 시골 장터가 이어진다.
백포와 구상... 전쟁의 상흔에도 시는 피어나고
벽화가 그려진 두만천을 약 2㎞ 거슬러 오르면 조선 중기의 무신 신유(1619∼1680)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약목에서 태어난 그는 효종 9년(1658)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 군함 10척과 270여 명의 군사를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웠다. 역사에 나선정벌로 기록된 전투로, 신유는 이 원정을 ‘북정일기’로 남겼다. 우리나라와 러시아 간 최초의 접촉을 현지 사령관이 기록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재실과 사당 등을 갖춘 유적지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바로 옆 두만지 호수 주변으로 덱과 흙길로 구성된 약 1㎞ 산책로도 조성했다. 비룡산 능선이 잔잔한 수면에 비치고, 이따금씩 물새들이 헤엄치는 풍광이 한적하고 평화롭다.
사당 아래에 ‘신유노래비’가 보인다. 장군과 같은 예명을 쓰는 가수 신유(본명 신동룡)의 ‘시계바늘’이 새겨져 있다. 그의 부친 역시 이곳 출신 가수였다. 지역의 인물이니 자랑하고자 하는 뜻은 이해하나, 신유 장군의 북정일기 기념비 정도는 함께 있어야 격식에 맞지 않을까.
약목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낙동강이다. 강 건너 왜관과 연결되는 왜관철교는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의 상징물이나 마찬가지다. 1905년 개통한 경부선 단선 철도교로 쓰이다, 상류에 복선 철교가 놓이면서 1941년부터는 국도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도보 전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경간 1개를 폭파하며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유엔군은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하며 북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해 지금은 ‘호국의다리'로도 부른다.
지난 13일, 겨울비가 그치고 강 안개가 봄날 아지랑이처럼 뿌옇게 피어올랐다. 500m 남짓한 다리 끝이 짙은 운무에 소실점을 잃었다. 메마른 겨울 풍광도 가려져 철교를 걷는 행인들만 트러스 속으로 하염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왜관철교 주변은 현재 교통의 요지로 변했다. 호국의다리 상류에 경부선 복선 철교가 놓였고, 그 사이에 차량이 다니는 왜관교가 자리 잡았다. 하류에는 4차선 제2왜관교가, 약 2㎞ 위엔 경부고속철도가 낙동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일대의 수변공원은 ‘낙동강 역사너울길’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되고, 왜관철교에서 칠곡보까지 구간은 별도로 ‘관호산성 둘레길’로 불린다. 관호산성은 1,500년 전 신라시대 토성으로 조선시대에는 일본과의 화친을 꾀한 외교정책(교린정책)으로 왜관을 설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성곽의 흔적이 희미한 산등성이에 관평루라는 현대식 누각이 세워져 있다. 좌우로 낙동강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고 강 건너엔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이 정면으로 보인다.
관호산성은 백포산성으로도 불린다. 관평루에서 능선으로 연결된 산책로를 따라가면 전망 좋은 쉼터에 ‘백포광장’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백포는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문신 채무(1588~1670)의 호다. 광해군 때 진사에 오르고, 인조 때 병조좌랑을 지냈지만 일찍이 정계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 ‘백포문집’에는 200편이 넘는 글이 수록돼 있는데, 소재가 다양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품격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산성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그의 이름을 딴 광장까지 만들었지만, 백포산성에서 그의 수려한 문장 하나를 접할 수 없으니 조금은 딱한 노릇이다. 휑하게 비어 있는 관평루에 그의 시 몇 수만 곁들인다면 전망대의 운치가 한층 멋스러워질 것 같다. ‘칠곡가시나들’의 훌륭한 시 선생으로 봐도 되지 않겠는가.
다리 건너 왜관읍엔 구상문학관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산에서 자란 구상(1919~2004) 시인은 1953년 왜관으로 내려와 현재 문학관이 세워진 강변에 둥지를 틀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베네딕도 수도원을 매개로 활동하던 그는 공산 정권이 들어서며 ‘퇴폐주의적이며,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요, 반역사적이요, 반인민적’이라 낙인 찍혀 결국 원산을 뜰 수밖에 없었다. 홀로 북한에서 탈출한 그가 왜관을 선택한 것은 독일로 철수했던 베네딕도 수도원이 왜관에 다시 들어선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그 인연으로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던 듯하다.
문학관 앞에는 연작시 ‘그리스도 폴의 강 24’ 시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 새 사람을 만나면서, 옛 강과 옛 사람을 만나는 착각을 한다." 강물처럼 흐르는 인생살이 말맛을 살린 칠곡가시나들의 시도 언뜻 구상의 강을 닮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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