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필명 지음, '아이폰 메모로 만든 책'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글을 써온 도구를 떠올려본다. 학창 시절, 글쓰기에 가장 익숙한 도구는 손에 쥐는 필기도구였다. 어떤 시절에는 연필이, 샤프가, 그러다 펜이, 심지어는 펜 중에서도 어떤 특정 펜이 글이 제일 잘 써진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다 노트북을 갖게 되면서 '종이에 쓰다'라는 행위가 '손가락 열 개로 자판을 두드리다'에 가까워져 왔고 그러기를 몇 년, 스마트폰이라는 기기가 등장하고 급기야 엄지손가락 두 개로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여태까지 겪어본 매체에 비해 단연 앞서는 스마트폰의 장점은 그것을 '매일 매 순간 지니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메모해야겠다 싶으면 스마트폰을 꺼낸다. 이제는 아무래도 노트와 펜을 챙기고 꺼내는 것보다 그게 간편하다. 이동책방을 운영하며 뭔가를 쓸 때도, 노트북보다는 스마트폰을 이용해서인지 이제는 메모가 아닌 꽤 긴 글도 스마트폰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노트북으로는 영 안 써지던 글이 스마트폰 메모장을 들여다봤을 때 더 잘 써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만나버린 것이다. 스마트폰이 되어버린 책을.
이 책은 리틀프레스페어라는, 독립출판 마켓에서 처음 만났다. 그 이름도 모양도 직설적인 '아이폰 메모로 만든 책'. 저자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쌓인 메모가 5,000여 개가 되었음을 발견하고 그중 몇 개를 추려 책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책의 모양은 실제 아이폰의 크기와 두께를 본떴고, 목차는 크게 '희망편'과 '절망편'으로 나뉘어 있으니 기분에 따라 선택해 읽길 제안한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원래 적었던 메모, 이어진 다음 장에는 그 메모를 현재 시점에서 본 후의 단상 혹은 메모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낸 글이 담겼다. 담백하고도 재치 있는 농담과, 참신한 발상, 짧은 소설 등 경계 없는 글은 자유로우면서도 그만의 단단함이 돋보인다.
"아이폰 메모가 왜 좋은지 알았다 / 따로 저장 버튼이 없다는 점 / 저장할까 말까 하는 헛소리들도 그대로 저장해 놓을 수 있다. / 술을 마시다가 누가 한 웃긴 이야기를 슬쩍 적기에도 편하고, 새벽 꿈결에 일어나서 방금 꾸던 꿈을 기록하기에도 편하다. (중략) 이것도 갑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적음 / 떡국 묵기" - 아이폰 메모로 만든 책 19p
이 책의 백미는 글의 '시작'을 미리 보여준다는 점이다. 보통 어떤 글을 읽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 글의 '가장 나중 모습'을 본다. 이는 글이란 처음부터 그럴듯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면이 있다. 어떤 글도 처음부터 그렇게 매끄럽고 완성된 형태일 리는 없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기보다 파편적이고, 마음은 막연하게 존재할 뿐 정리된 언어로 표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재밌다. 글 이전에 어떤 메모가 있었는지, 무엇을 보았고 겪었는지를 가감 없이 먼저 보여주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는 완성된 글에는 웬만하면 드러나지 않는 무수한 조각을 발견하고, 다듬어지기 전에만 보여줄 수 있는 부분까지 함께 읽어낼 수 있다.
"일단 하셔야(Do) 합니다." 책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며 늘 하는 말이다. 너무 뻔해서 하나 마나 한 말 같지만, 다들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기도 하다. 올해에는 '그것이 저장할 만한지' 고민할 필요 없는 스마트폰에 기대서라도 무엇이든 적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가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완성된 결과만을 보아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짧은 단상이어도 좋고, 링크를 붙여넣기해도 좋다. 적는 것은 머릿속에만 머물던 생각을 눈에 보이도록 구체화하는 일이면서, 새로운 발견을 체화하는 출발점이므로. 씀으로써 일상을 직시하다 보면 서서히, 진짜 원하는 삶에 다가가 있는 자신을 마주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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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예진 책방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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