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민사재판에서 눈에 띄게 느려진 법원의 사건처리
ADR 등 패러다임 변화에 맞춘 제도 보완책 필요
소액사건은 재판보다 타협과 조정이 활성화돼야
"사건은 한없이 끌었다. 소송의 전모가 너무나 복잡해 생존자 중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수많은 판사가 자리를 들락날락했고 산더미 같은 서류가 무의미한 죽음의 종잇조각으로 변신했다." 초장기미제 사건을 묘사한 것 같은 이 글은, 1789년 유언 없이 죽은 부호의 유산을 둘러싸고 수십 년간 계속된 소송을 소재로 했다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의 일부다. 소설에서는 누구도 승소하지 못한다. 유산이 소송 중 발생한 비용에 모두 충당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대와 좌절이 반복되는 햇수가 누적돼서일까. 한 해가 시작되는 이 무렵의 달뜬 정취에 심드렁해진다. 인간의 삶이란 게, 주기적으로 '멀리건'을 외치거나 고통을 영(零)으로 리셋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해라서 시간을 임의로 구분해 놓은 것만 같다. 그래도 희망 없이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나 역시 판사로서 품고 사는 바람이 있다. 법원으로 온 분쟁이 신속하고 적절하게 해결되기를, 그리하여 사람들이 덜 고통 받고, 더 빨리 슬픔에서 헤어나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디킨스 소설의 런던처럼 짙은 안갯속이다.
개인 간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 분야에서 갈등이 심각하다. 자체 해결기능이 망가지다 보니 온갖 분쟁이 법원으로 몰린다. 최근 몇 년 사이 법원의 사건처리 속도가 눈에 띄게 늦어졌다. 민사재판에서 특히 심하다. 고등부장 승진제도가 폐지되어 판사들의 동기부여가 사라진 것, 판사들이 워라밸을 추구하면서 예전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 등이 원인으로 언급된다. 판사들의 소명의식이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인지, 주야로 몸을 갈아 넣으며 일하는 이전 방식이 정상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해결책으로 판사의 증원이 거론된다. 그러나 증원은 근본적 해법이 아니다. 현재 사법 현장은 과거 시스템이 와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총체적 난국 상황이다. 외연의 확대로 수습할 수 있는 국면을 벗어났다.
사법 패러다임의 변화를 직시하고 전통 사법절차를 보완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형사법 영역에서는 치료사법을 바탕으로 한 문제해결법원을, 민사법 영역에서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고, 대체적 분쟁해결(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법원도 오래전부터 판결보다 조정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당사자들은 조정을 무척 싫어한다. 연 65만~70만 건 정도 접수되고 민사본안사건의 약 7할을 차지하는 소액사건 중 조정으로 끝나는 사건은 2015년 2만5,408건(3.5%), 2016년 2만2,781건(3.3%), 2017년 2만3,058건(2.9%), 2018년 2만2,104건(3.1%), 2019년 1만8,446건(2.7%), 2020년 1만5,791건(2.4%)에 불과하다. 이토록 합의가 안 되는 이유는, 조정을 2급 정의라 여기고 승패가 확연한 판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워낙 강해서다. 그러나 분쟁의 전체 국면에서 조망하면, 단언컨대 조정이 가장 빠르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상대를 괴멸시킬 수 없음에도 버티기만 하면 공멸한다. 재판은 파국을 피하고자 국가권력을 빌려 일방을 부수고 전진하는 절차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콜래트럴 데미지'(부수적 피해)가 막심하다. 디킨스의 소설처럼 우리가 가진 유산도 얼마 남지 않았다. 뭐라도 건지려면 타협의 자세가 절실하다.
"나는 훨씬 더 무거우면서 동시에 선율이 아름다운 걸 찾고 있었지. 헤비메탈과는 다른 무엇을"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정체기에 빠진 록의 변화를 꿈꾸며 말했듯, 희망은 거창하거나 심오한 게 아니다. 희망은 교착상태에 빠진 삶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뭔가 다른 것(Something differe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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