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AE 300억 달러 투자 유치는
오래 공들인 한국 외교의 성과
더 많은 결실 예비하는 외교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무함마드 왕세제가 통화를 피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하시고 이제 끝내시죠.” (중략) 나라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통령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원전 수주의 실권을 쥐고 있는 무함마드와 계속 통화를 시도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의 핵심 비결로 각고의 정상외교 노력을 꼽았다. 이 전 대통령이 외교 참모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수차례 통화 약속을 다시 정하는 정성을 들인 ‘무함마드 왕세제’는 당시에도 실권자였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이다. 원전 발주를 대가로 안보 협력을 얻으려 하는 무함마드의 관심사를 붙잡고자 ‘형제국과 같은 협력 관계’를 약속했고, 덕분에 수주가 유력했던 프랑스를 제치고 건설사업권을 따냈다는 게 그의 회고담이다.
그로부터 햇수로 15년째인 올해 윤석열 대통령은 UAE에서 무함마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300억 달러(약 37조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유치한 해외투자 총액과 맞먹는 액수다. 대통령부터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며 UAE 경제외교에 총력을 다한 결실이긴 하나 현 정부만의 공로가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가 극적으로 원전 건설을 수주한 뒤 박근혜 정부가 원전 운영권까지 확보하고 문재인 정부가 양국 관계를 ‘특별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면서 장기간 UAE에 외교 기반을 다져왔기에 가능한 결과다. 역경에도 계약을 철저히 이행하며 신뢰를 쌓은 우리 기업들의 공로도 크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꾸준히 교류의 씨를 뿌려 가꾸고 수확을 거두길 반복하는 일을 외교에 비유할 수 있는 이유다.
한편으로 외교는 주고받은 일이라 일련의 ‘UAE 쾌거’ 이면에 우리가 껴안은 ‘채무’가 있다는 추측에도 힘이 실린다. 특히 윤 대통령이 현지 파병된 우리 아크부대 장병을 상대로 “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언급한 일을 계기로, UAE가 위협을 받을 때 한국이 군사 원조를 한다는 비밀 협약이 양국 간 체결됐다는 오랜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한국과 UAE는 형제국→형제국의 안보는 우리의 안보→UAE의 적은 이란'으로 전개된 대통령 발언을 두고 즉흥적이라기보단 저 협약을 염두에 둔 말실수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다음에 이어질 말이 능히 짐작될 만한 정연한 논법이라 이란의 거센 항의를 피하긴 힘들었다.
책임 있는 정부라면 외교에서 빛나는 성과만 취할 수 없다. UAE 외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중동 유일의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건사하려면 그 관계를 지탱하는 숨은 요소들까지 잘 관리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구두로 약속하고 박근혜 정부가 양해각서(MOU) 형태로 체결했다는 저 비밀 협약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협약에 '자동 파병' 조항이 담겼다면 국회의 파병 동의권이 무력화되고, 복잡한 중동 정세에 우리 군이 휘말릴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초기에 협약 내용에 손을 대려다가 UAE의 강한 반발에 직면할 만큼 민감한 사안이 됐다. 한국과 이란, UAE와 이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협약의 존재를 시인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수확은 새로운 씨앗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양질의 종자를 가려 다시 뿌리는 일은 외교의 진전에 비할 만하다. 윤석열 정부가 UAE에서 추수한 외교 성과를 면밀한 후속 작업으로 잘 이행한다면 나중에라도 더욱 큰 결실로 돌아올 것이다. 파종과 수확만큼 중요한 일이 애초 나쁜 씨앗을 뿌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은 UAE에서 중동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내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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