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시즌2 : 실패연대기] <1>퍼블리 창업자 박소령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모든 실패를 기록해 축적하는 퍼블리
“실패를 실패 자체로 끝내는 게 최악”
박소령이 만드는 ‘독보적 실패의 역사’
그를 인터뷰한다고 하자, 주위에서 그랬다. “박소령 대표한테 무슨 실패가 있겠어?”
그럴 만도 하다. 커리어를 보면 기가 확 질린다. 서울대 경영학과-맥킨지 한국사무소-하버드 케네디 스쿨-퍼블리 창업자이자 CEO. 마흔두 해를 사는 동안 써온 이력서다.
퍼블리는 직장인의 커리어 계발을 돕는 콘텐츠 플랫폼으로 시작해, IT 개발자 커뮤니티와 인재 채용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영역을 넓혔다. 디지털 미디어 시장에서 유료화의 세기를 연 스타트업이기도 하다. 유료 콘텐츠의 토양 자체가 척박했던 2015년 창업했다. 그러니 이 회사의 족적은, 이제는 대다수 미디어의 당면 과제가 된 디지털 콘텐츠 유료화의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 화려한 개척자에게 과연 실패담이 있을 것인가. 정작 그의 반응은 이랬다. “실패요? 너무나 많죠. 하하.” 인터뷰 요청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다.
투자자를 찾지 못해 7개월여를 거절에 거절만 당하던 창업 초 위기부터, 성장이 멈춰버린 듯했던 4년 전 ‘암흑기’는 이제껏 그가 공개해본 적 없던 고비들이다. 그것뿐인가. 그의 이력서에 케네디 스쿨은 ‘최우수 논문상 후보’로 귀결되지만, 지독한 열패감을 처음으로 맛보고 그로 인해 자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해본 시기라는 건 부모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그러나 3할 타자도 70%의 실패가 만드는 것이라고 재일한국인 ‘야구 영웅’ 장훈은 말했다. 숱한 실패에도 박소령은 기꺼이 배트를 쥐고 날아오는 공을 받아쳤다. 자신의 롤모델인 김성근 감독의 말처럼, 인생 지금 이 순간 ‘일구이무(一球二無ㆍ다음은 없다)’니까. 그라운드 위에 서 있기만 한다면, 경기는 계속된다.
게다가 이 선수는, 자신의 실패를 곱씹고 기록한다. 퍼블리 모든 구성원의 루틴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도한 모든 프로젝트에 미니 회고록을 남긴다. 말하자면, 실패의 역사이자 사서다. “실패가 그저 실패로 끝나도록 내버려두는 게 최악이다.”
‘1등이거나, 유니크하거나.’ 그의 인생 모토는 실패에도 적용됐다. 기록으로 축적한 ‘독보적 실패(unique failure)’. 박소령의 가장 가치 있는 비밀 자산은 이거였다.
[실패①] 청소년기, 두 번의 낙방
공부는 싫어했지만, 책은 좋아했다. 신문부터 만화까지. 온라인에 그의 책장 사진이 올라온 적이 있다. 칸마다 책을 겹겹이 꽂아 책장 바닥이 모두 아래로 휘어 있었다. 책은 그에게 등대였다. 인생에서 힘든 일에 부닥칠 때마다 서점에 갔고, 거기서 집어 든 책에서 푯대를 찾았다는 건 인터뷰 막바지에 알게 됐다.
공부를 싫어했다고, 성적이 나쁜 건 아니었다. “요령이 좋아 시험은 잘 본 덕분”이라고 그는 학창시절 성적을 겸손하게 표현했다. 우등생 딸에게 부모가 바란 길은 특목고 진학 후 의대 입학.
이때까지만 해도 ‘K-장녀’의 면모를 두루 갖췄던 그도 자연스럽게 그 길을 자신의 꿈으로 받아들였다. 사달은 여기서 났다. 과학고 입시에 낙방한 거였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인생의 첫 실패다.
“(얼떨떨해서) ‘오’ 싶었죠. ‘아, 나도 떨어지는구나. 경쟁에서 탈락했구나. 세상에는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 걸 처음 느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실패, 아니 별것 아닌 경험인데.”
그는 웃었다. 그래도 그 실패 덕에 장래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저 ‘이 정도 공부하면 의대에 가야지’라는 주변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던 게 문제였죠. 그때까지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데에 의구심이 없었어요. 내가 바라는 미래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요. 어리석었죠.”
두 번째 실패는 고3 때 찾아왔다. 부모가 원하던 대학에 떨어졌다. 따지고 보면 과학고 낙방이란 첫 실패와 궤를 같이한다.
“고2 때 책 ‘하버드 MBA 365일’을 읽고 세상에 이런 삶이 있구나 싶었죠. 그걸 다 읽고 나서 ‘나, 이거 하고 싶은데!’ 했거든요.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거죠. 그런데 관철시키지 못했어요.”
유명 컨설팅 회사 베인 앤드 컴퍼니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저자(로버트 레이드)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해 배우고 경험한 것을 쓴 책이다. 이 책에서 미래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이과로 계열을 선택한 뒤였다. 문과로 옮겨 경영대에 진학하길 원했으나, 부모도 학교도 반대했다. 목표를 잃었으니, 공부에 열정이 불타오를 리 없었고 대입 실패로 이어진 거다. 부모도 그때는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1년 뒤, 그는 원했던 학교와 학과에 합격한다.
10대의 쓰라린 경험으로 그는 무얼 얻었을까.
“부모가 원하는 인생을 살면 안 되겠다는 것. 나는 내가 바라는 목표여야 그걸 이룰 의지도, 능력도 나오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죠. 이후로 선택지 앞에서 고려하는 건 ‘내가 뭘 좋아하지? 나는 뭘 원하지?’예요.”
[실패②] 두 번의 사표
그는 자신을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걸 비로소 깨달은 계기는 20대의 방황기였다. 원하던 대학, 학과에 입학했는데 또다시 혼란스러운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점을 찍어놓고 달려가는데 저는 계속 ‘이 길이 맞나’ 고민했어요. 질풍노도의 시기가 제겐 20대였죠.”
우연히 집어든 책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영감을 줬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이 세계화의 불가피함과 그 대비책에 관해 쓴 책이다. 1999년 출간돼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읽혔다.
“프리드먼은 글로벌 시대가 되는 21세기엔 두 직종이 아주 중요해질 거라고 전망하죠. 하나는 전략가이고 다른 하나는 저널리스트예요. 전략가에게는 변화하는 시대를 설계할 책임이, 저널리스트엔 그 변화를 설명할 책임이 있다는 거예요.”
그의 마음을 움직인 직업은 컨설턴트였을까, 저널리스트였을까. 후자였다. 말하자면, 경영부문 전문기자가 돼보자는 거였다. 맥킨지에 지원할 때도 ‘비즈니스 전문기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 그 전에 실무를 쌓고 싶어 지원한다’고 썼다. 맥킨지는 그런데도 그를 뽑았다. 그는 1년 남짓 맥킨지에서 비즈니스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컨설팅 업계는 사람이 곧 미래인 곳이에요. 그래서 사람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죠. ‘너희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우리가 너희를 뽑았다는 걸 기억해라. 스스로를 못 믿겠으면 우리를 믿어라.’ 엄청난 경력을 쌓은 임원들이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 얼마나 자부심이 생겼겠어요.”
그 맥킨지를 그만둔 건 머릿속을 맴돈 고민 때문이었다. ‘이런 중요한 사건, 사고가 계속 일어나는데 내가 과연 기업의 컨설팅을 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그에겐 ‘기자의 심장’이 있었다.
결국 기자 시험을 준비해 유수의 언론사에 합격했지만, 출근 첫날 그만뒀다. 맥킨지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경험했고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기자 박소령’은 수습기자 공채 최종합격자 명단에만 존재하게 됐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것 역시 내가 결정한 나의 길”이었으니까. 두 번의 사표는 그러니까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피한 선택이다.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미련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진짜 실패는 시도조차 안 하는, 미리 꺾이고 마는 마음이니까.
[실패③] 자아가 파괴된 시간이 준 것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한 시기였어요.”
그는 인생에서 경험한 실패 중 이때가 가장 처참했다고 말했다. 안 좋은 기억은 잊는 편이라는 그에게 아직도 “자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한 시기로 남아있다. 유학 시절이다. 시행착오의 시기를 보내고 그는 유학을 택한다. 언젠가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기자까지 그만둔 마당에 미룰 이유가 없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둔 곳은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이었다.
“일단 케네디 스쿨에 가는 게 목표였지, 학위를 받은 이후에 뭘 할지는 채우지 못한 채 떠난 게 문제였죠.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각자 정한 방향이 다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게다가 다 어마어마한 경력을 쌓고 온 애들이었죠. 예를 들어, 한 친구는 대학 때부터 공공정책에 관심이 있어서 오바마 캠프를 거쳐 백악관에서 일하다 온 아이였어요. 대부분 그런 식이었죠. 그러니까 스케일이 다른 발표를 할 수 있는 거였어요. 나와는 경험의 깊이도, 수준도 너무나 달랐죠. 그건 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저런 애들이 리더가 되는구나’ 싶었죠. 너무 부럽고 질투가 나다 못해 화가 났어요. 지금까지 잘난 줄 알고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죠.”
노력할 의지마저 잃은 거다. 결국 병이 됐다. 수업을 자꾸 빠지자,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이메일은 물었다. “수업에 계속 안 들어온다는데, 괜찮은가요?” 그는 회신했다, 힘들다고. 학교에선 학내 상담센터를, 상담센터에선 다시 대학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연결해줬다. 그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그런데 그 과정 자체로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가려는 이가 생길 때 보호하는 장치가 체계적으로 돼 있더라고요. 그 과정도 참 좋았어요. 상담을 받고 약도 받아 왔는데 그 약이 책상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더라고요.”
1년을 쉰 뒤 복학한 그가 세운 목표는 이거였다. ‘졸업만 하자.’ 내려놓으니 여유가 찾아 들었다. 수업도 필요한 게 아닌, 듣고 싶은 과목으로 택했다. 다행히 그때 만난 노교수들이 지향점이 됐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겸손하고 소탈하며 너그러운 데다 위트까지 넘쳤어요. 그렇게 나이 들고 싶었죠.” 한 학기 동안 논문을 쓰면서 오랜만에 성취감을 맛봤다. 그가 택한 주제는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를 사례로 한 미국 사회의 위기 관리 커뮤니케이션. 그가 쓴 논문은 최우수 논문상 후보가 됐다.
“유학을 떠나기 전과 후의 저는 다른 사람이에요. 내면의 요소가 완전히 바뀌었죠. 그때 깨달았어요. 고민이 있을 때 혼자 싸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도와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요. 돌이켜 보면, 주위에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한 시기가 참 길었어요. 완벽해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는 퍼블리 창업 후 인재를 채용할 때 이런 질문을 한다. 인생에서 에고(자아)가 산산조각 난 시기가 언제이고 어떻게 회복했는지. 사람은 바닥을 친 이후 훨씬 단단해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패④] 더 이상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귀국해서 그는 한동안 ‘무소속’이었다. 머릿속엔 ‘콘텐츠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보자. 그게 다음 세대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일이면 좋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었다. 피고용인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경력과 학력은 훌륭했으나, 그 경력을 활용하겠다고 나서는 회사가 없었다. “애매하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헤드헌터를 찾기도 했지만, 6개월 넘게 뾰족한 답이 없었다.
그 시기에 알게 된 사람이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을 창업한 이재웅 전 쏘카 대표다. 지인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했다. 그의 막연한 구상을 들은 이 전 대표는 창업을 권했다. 기존 조직에서 시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 성 바깥에서 도전해보라는 얘기였다.
창업은 그에게 없던 선택지였다. 6개월을 망설였다. 결과적으로 이 전 대표의 이런 말이 그를 움직였다. “사업을 20년쯤 해보니, 운의 영역인 면이 있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될 수 있다. 결과에 목숨 걸고 사업하면 불행하지만, 과정의 즐거움을 느끼고 기록으로 남길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보는 게 어떤가.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말이 그 안에 남아있던 공적 마인드에 불을 붙인 거다. ‘오케이, 내가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그 기록과 노하우가 남아있기만 하다면, 누군가 같은 시장에 들어왔을 때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어차피 우리가 기업에 들어가서 임원이 될 때까지 일한다고 해도 쉰 살 넘으면 나와서 자기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젊을 때 먼저 시작하라”는 친구의 말도 자극이 됐다. 퍼블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퍼블리는...
퍼블리는 2015년 4월 첫 발을 내디뎠다. 이재웅 전 대표가 투자하면서 출발부터 화제였다. ‘콘텐츠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박소령 대표의 초심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구현됐다. 소비자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보고 싶은 콘텐츠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이었다. 이후 구독 모델(유료 멤버십)을 주축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현재 퍼블리 멤버십의 누적 유료 구독자 수는 10만 명에 달한다.
멤버십이 성공한 비결은 타깃층에 필요한 콘텐츠를 적확히 내놓은 덕분. 사수가 딱히 없는 중소기업 신입사원, 사수에게 물어보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는 MZ세대 직장인, 리더 교육 없이 첫 중간 관리자가 된 ‘새내기 팀장’ 등이 퍼블리의 주요 구독층이다. 예를 들어, ‘어느 날 팀원이 퇴사하겠다고 말할 때 팀장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문제에 대처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수는 멀고 휴대폰은 손 안에 있는 이들에게 퍼블리는 ‘랜선 사수’를 자처했다.
최근엔 사업 영역을 대폭 확장했다. 2021년 문을 연 개발자들의 업무 공유 네트워킹 서비스 ‘커리어리’는 올해 1월 기준 누적 가입자 수가 29만 명을 넘어섰다. 기업을 대상으로 한 클라우드 기반 인재 채용 소프트웨어(SaaS)인 ‘위하이어’도 올해 초 출시했다.
‘대표 박소령’의 첫 위기는 창업 2년이 안 돼 찾아왔다. 2017년 두 번째 투자금을 확보해야 할 시기였다. 대표인 그가 직접 뛰었다. 목표액이 12억 원이었지만, 그해 초 벤처캐피털(VC) 한 곳에서 5억 원 투자 약속을 받은 이후 7개월간 빈손이었다. 투자를 요청하는 그에게 VC들은 물었다. “시장이 얼마나 크죠?” VC들이 보기에 유료 디지털 콘텐츠 시장은 의구심투성이였다. 투자자 30~40명을 만났지만 줄줄이 거절당했다.
“정말 못할 일이더라고요. 회사의 미래에 투자하는 걸 거절한 거였지만, 제게는 박소령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로 들렸거든요. 게다가 연속으로 수십 번 거절을 당하니까 타격이 컸죠.”
투자 유치를 하지 못한 기간, 그는 회사 운영에 사비를 쏟아 붓고 빚도 냈다. 울기도 정말 많이 울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 7개월 만에 VC 세 곳이 투자를 결정해 목표액을 달성했다.
“2017년 8월 통장에 돈이 들어온 날 밤, 인세를 지급해야 할 저자들에게 돈을 다 보냈어요. 밤새 일을 하고 동이 터 오를 무렵에 택시를 타고 퇴근했죠. 그때 마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기쁨과 비장한 각오가 뒤섞였죠.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말자, 이런 상황을 만들지 말자’고 결심했어요.”
대표인 이상 자신의 실패는 곧 퍼블리와 퍼블리 구성원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체감한 거다.
투자 유치에 잇따라 실패했던 7개월, 그 시간이 그때는 지옥 같았겠지만 덕분에 큰 교훈을 뼈에 새겼다.
“결국 CEO의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는 회사에 돈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란 걸 절감했어요. 자금 상황, 매출, 고정 지출을 확인하고 사업 계획에 따라 미리 투자 유치를 준비해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은 거죠. 내 역할과 위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그는 이후엔 회사 상황이나 과제, 고민을 회사의 신뢰하는 리더들에게 터놓고 상의한다.
“함께 고민하면 더 나은 솔루션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또 한번 깨달았죠. 고민이 있다면 혼자 싸매고 있지 말고 주위에 말해야 한다는 걸.”
목표 투자액 12억 원을 모으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던 시절을 딛고, 퍼블리는 2019년 2월 38억 원, 2021년 7월엔 135억 원을 투자받는 데 성공했다.
[실패⑤] 성장이 멈.췄.다.
자금 위기를 이겨냈더니, 정체기가 찾아왔다. 2019년 투자 유치에 성공한 이후 이듬해 여름까지 1년 반 동안 사업의 모든 지표가 제자리였다. 회사가 성장해야 직원들은 신이 나 일하고, 투자자는 안심한다. 변화무쌍한 디지털 시장에서 정체는 퇴보나 마찬가지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어요. 게다가 아끼는 핵심 인재 중 한 명은 회사가 내년에도 이렇다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말하더군요. 서운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회사가 성장을 멈추면 인재가 먼저 떠난다는 걸 알게 됐죠.”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심정이었다”고 돌이켰다. 멤버십 무료 체험이나 장기 구독 서비스 같은 프로모션 다각화를 시도했다. 마케팅 전문가도 채용했다. 꿈쩍 않던 매출은 2020년 4분기가 돼서야 치솟기 시작했다. 이전에 비해 10배가 뛰었다. 말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매 시간 매출 지표를 확인했다. 회사의 에너지는 다른 데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왜 그런 ‘암흑기’가 찾아왔는지 돌아보는 것.
“퍼블리의 초창기 이용자는 돈도 기꺼이 지불할 만큼 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층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 층을 다 끌어 모은 거였죠. 그럼, 다음 타깃층을 찾아야 하는데 그걸 안 한 거예요. 제가 고민을 하지 않은 거고, 그래서 전략도 없었던 거죠.”
여러 시도 뒤 찾아낸 다음 구독층이 바로 신입사원들이었다.
“정체기에 발행하는 콘텐츠에도 여러 변화를 시도했어요. 10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도록 콘텐츠당 분량을 줄이고, 아이템도 업무 이메일 쓰는 법, 직장인의 시간 관리 방법, 회의록 쓰는 법 같은 실무 요령들을 넣었고요. 그랬더니 반응이 폭발적인 거예요. 신규 구독층이 어떤 이들인지 분석해보니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이었던 거죠.”
‘당신 곁의 랜선사수’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거기서 비롯됐다.
[실패란] “난 엄청나게 잘 일어나거든!”
이쯤에서 물어야 했다. 스타트업하기를 권했던 이재웅 전 대표의 말처럼 과정이 즐겨지더냐고. 그는 숨도 안 쉬고 답했다. “아니오. CEO가 되어 보니 결과는 매우 중요하더라고요. 하하.”
퍼블리의 대표로 경험한 크고 작은 실패들은 이전의 개인 박소령이 겪은 실패와는 층위가 다름을 느꼈기 때문일 테다. 그래도 그는 실패의 과정에서 더 이상 혼자도, 혼자여서도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실패의 살아있는 정의를 다시 써본다면 뭘까요.
“그렇게 생각해요. ‘실패를 했다, 쏘 왓(So what)?’ 그다음이 중요하다는 거죠. 실패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최악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돌아봐요. 그 실패는 왜 비롯됐나,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퍼블리에는 회고라는 고유한 루틴이 있어요. 호기롭게 출시한 제품이 망해도, 잘돼도 반드시 돌아보고 이를 기록해요. 발생한 문제가 뭐였는지(Problem), 왜 그랬는지(Why), 개선방안(Try)은 뭔지 논의하고 문서로 남기는 거죠. 팀 단위로 일상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연말 타운홀 미팅에서 한 해 전반의 회고도 해요.”
일종의 실패의 역사를 쓰고 있는 셈이다. 이미 7년치가 퍼블리 안에 누적돼 있다.
-왜 기록해서 보관까지 하나요.
“사회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은 내부 자산이지만, 언젠가는 외부에 공유해 퍼블리 같은 시도를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아이작 뉴턴이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덕분’이라고 말했잖아요. 역사적 토대를 빗댄 표현인데, 우리가 쌓은 실패의 기록이 그 어깨를 두껍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사회에 특히 부족한 게 이것이죠. 실패를 공개하거나 공유하길 꺼려하는 게 대부분이니까.”
-인생의 실패에서 건져 올린 ‘삶의 도’는 뭔가요.
“회사의 어떤 구성원이 실패를 하더라도 절대 혼자 곱씹게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회고라는 루틴을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구성원 각자의 시각이 다르니 다각도로 실패를 바라볼 수 있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자책한들 답이 없어요. 실패를 꺼내서 나눠야 해요.”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배경 사진은 만화 ‘스킵과 로퍼’의 한 대목. “난 말이야. 다소 거창하게 넘어질 때가 많은 인간이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잘 일어나거든!”이란 대사다.
“어떻든 인생은 매일매일 실패가 있어요. 직원 중 한 명이 퇴사를 해도 제겐 실패고, 어제보다 지표가 좀 떨어져도 실패죠. 그렇다고 마냥 넘어져 있을 순 없잖아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죠.”
실패,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일어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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