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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액은 같지만 맛은 다르다···마니아 사로잡는 '독립병입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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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액은 같지만 맛은 다르다···마니아 사로잡는 '독립병입 위스키'

입력
2023.01.27 04:30
수정
2023.01.27 20:4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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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병입 위스키 전문 바 퍼플라벨의 김진석 대표가 소장 중인 독립병입 위스키(오른쪽 4종)와 바에서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독립병입 위스키들. 김영원 인턴기자

독립병입 위스키 전문 바 퍼플라벨의 김진석 대표가 소장 중인 독립병입 위스키(오른쪽 4종)와 바에서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독립병입 위스키들. 김영원 인턴기자

위스키를 좋아해서 1년 전부터 위스키 전문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기 시작한 최준혁(25)씨는 독립병입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 독립병입 위스키란 특정 회사가 다른 증류소에서 원액이 담긴 오크통을 구입해 독자적으로 숙성시키고 병입해 자신들의 브랜드로 출시하는 위스키를 말한다. 맥켈란, 발베니, 글렌피딕 등 증류소를 소유한 회사들이 자체 브랜드로 판매하는 공식 위스키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최씨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 위스키인 글렌알라키를 자주 마시다 이 증류소의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 독립병입 위스키를 맛보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글렌알라키 증류소의 원액을 버번 캐스크에 담아 숙성한 독립병입 위스키가 있다는 말에 어떤 맛일까 궁금했어요. 글렌알라키 위스키는 찐득한 셰리 맛이 특징인데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한 위스키는 시원한 푸른 과일의 뉘앙스가 매력적이더군요. 같은 증류소의 위스키를 사용하는데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독립병입 위스키에 관심을 갖게 됐죠.”

최씨가 마셔 본 독립병입 위스키는 50~60여 종. 바텐더로 일하면서 위스키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그는 “같은 증류소의 원액을 사용한 공식 위스키와 독립병입 위스키는 맛의 결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맛을 낼 수도 있다”면서 “맛의 스펙트럼이 공식 위스키보다 훨씬 다양한 게 독립병입 위스키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팬데믹 기간 싱글몰트(단일 증류소에서 맥아로만 만든 위스키) 위스키 붐을 타고 국내 위스키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독립병입 위스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21년 국내 최초의 독립병입 회사가 등장했고, 팬데믹 전만 해도 두세 군데에 불과하던 독립병입 위스키 수입 업체는 열 곳 가까이 늘었다. 독립병입 위스키 전문 바를 표방하는 곳도 생겼다. 불과 3년여 만에 일어난 변화다.

위스키 전체 시장 규모에선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변화는 뚜렷하다. 지난해 독일의 독립병입 위스키 브랜드 산시바의 제품들을 수입하기 시작한 로엔히의 최재식 대표는 “스무 종류 제품으로 600여 병을 먼저 수입했는데 들여오자마자 예약만으로 대부분 판매가 끝났다”고 말했다.

위스키 마니아가 아니라면 독립병입이라는 용어가 생소하겠지만 영국의 위스키 역사에선 아주 오래된 개념이다. 블렌디드 위스키(몰트 위스키와 밀, 옥수수, 보리 등 곡물 원료로 만든 그레인 위스키를 혼합한 위스키)의 대명사로 불리는 조니워커, 발렌타인도 초창기엔 증류소에서 위스키 원액을 구입한 뒤 자신의 브랜드로 판매했으니 출발은 독립병입자였다고 할 수 있다.

최소 3년 이상, 평균 10년 안팎의 기간 동안 숙성한 뒤 판매해야 하는 위스키 시장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해 증류소와 독립병입 업체는 오랫동안 공생 관계를 맺어왔다. 증류소 입장에선 공급이 수요를 초과할 경우 남는 위스키를 판매할 곳이 필요했다. 브랜드 성격에 맞지 않는 원액이 만들어지면 독립병입 업체에 넘기기도 했다. 위스키 원액 납품 전문 증류소가 유명 브랜드에 공급한 뒤 남은 원액을 독립병입자에 팔기도 한다.

대표적인 독립병입 위스키 회사는 고든 앤드 맥페일, 카덴헤드, 시그나토리, 더글라스랭,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SMWS) 등이다. 최근 들어선 대형 독립병입 회사가 증류소를 사들이거나 반대로 증류소가 독립병입 회사를 사들이면서 공식 위스키와 독립병입 위스키의 경계가 흐려지는 면도 없지 않다. 국내에는 위스키 내비를 시작으로 달달 위스키 등이 독립병입 방식으로 위스키를 출시하고 있다.

김진석 바 퍼플라벨 대표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파크 증류소에서 나온 원액으로 만든 공식 위스키(왼쪽)와 독립병입 위스키를 함께 들어 보이고 있다. 김영원 인턴기자

김진석 바 퍼플라벨 대표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파크 증류소에서 나온 원액으로 만든 공식 위스키(왼쪽)와 독립병입 위스키를 함께 들어 보이고 있다. 김영원 인턴기자

독립병입 위스키는 유명 위스키 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각 제품의 수량도 훨씬 적다. 한 오크통에 있는 위스키를 다른 오크통과 섞지 않는 ‘싱글 캐스크’ 방식의 제품이 많으며 숙성 후 물을 거의 첨가하지 않아 대체로 알코올 도수가 50%를 넘는다. 오크통에서 나온 불순물과 침전물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담는 제품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스키는 오크통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개성 강한 맛과 향을 내게 된다. 위스키 전문 바 하이드아웃의 박제영 대표는 “독립병입자들은 단순히 위스키 원액을 사 오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증류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시도를 하기도 한다”며 “독립병입 위스키가 반드시 공식 위스키보다 더 맛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는 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블렌디드 위스키보다 싱글몰트 위스키가 개성이 다채롭듯, 독립병입 위스키는 일반 싱글몰트 위스키보다 한층 더 예리한 개성을 지닌다. 그만큼 품질의 격차도 심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맛이 나오기도 한다. ‘독립병입 위스키는 지뢰밭’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같은 이름으로 만들 수 있는 위스키 병의 수가 한정적이어서 희소성이 있는 데다 오리지널 위스키가 품지 못하는 다채로운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독립병입 위스키는 위스키 마니아들을 끌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닌다.

독립병입 위스키를 소비하는 층은 주로 20대에서 40대 초까지의 MZ세대다. 독립병입 위스키만 200여 종을 보유하고 있는 전문 바 퍼플라벨의 김진석 대표는 “국내에 수입되는 오리지널 위스키의 수가 한정적이다 보니 웬만한 브랜드를 맛 본 분들이 독립병입 위스키로 관심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며 “바를 찾는 고객의 연령층은 주로 30대 중후반과 40대 초”라고 설명했다. 위스키 동호회 형태로 시작해 국내 최초 독립병입 위스키 회사가 된 위스키 내비의 천관호 대표는 "위스키 내비라는 브랜드로 25종의 위스키를 출시했는데 우리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 층은 주로 20, 30대"라며 "수요가 크게 늘어난 건 아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독립병입 위스키의 선택지가 무척 넓어졌다"고 말했다.

다만 독립병입 위스키가 마니아층을 넘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에는 한계도 안고 있다. 위스키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여러 기술적인 용어를 알아야 하는데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낯설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박제영 대표는 "독립병입 위스키에 대한 관심이 아직 체감할 정도로 높아진 건 아니다"라면서 "위스키 소비자 수가 워낙 적은 데다 독립병입 위스키는 좀 더 깊은 지식이 필요하기에 초심자가 독립병입 위스키로 넘어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는 듯하다"고 말했다.

독립병입 위스키 중에는 오크통에서 떨어진 침전물이 그대로 담기는 제품도 있다. 이런 제품은 로 캐스크(Raw Cask)라 불린다. 위스키 내비 제공

독립병입 위스키 중에는 오크통에서 떨어진 침전물이 그대로 담기는 제품도 있다. 이런 제품은 로 캐스크(Raw Cask)라 불린다. 위스키 내비 제공

독립병입 위스키를 접할 수 있는 방법도 극히 제한적이다. 국내에 수입되는 물량이 두 자릿수가 넘지 않는 제품이 허다한 탓에 대형 마트나 편의점에서는 만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마니아들은 적잖은 세금을 감수하면서 해외 직구를 선택하기도 한다. 관세청에 따르면 2019년 약 8만 달러 수준이던 국내 소비자들의 해외 직구 위스키 구매액은 지난해 664만 달러로 무려 80배 이상 늘었다.

낯선 독립병입 위스키 세계에서 취향에 맞는 위스키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가들은 병에 붙어 있는 라벨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김진석 대표는 “라벨에 쓰인 증류소 이름이나 캐스크 종류, 숙성 연수 등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찾을 수 있고 품질이 떨어지는 ‘지뢰’를 피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박제영 대표는 "국내 주세 체계상 저숙성 위스키는 독립병입 제품이 대체로 더 비싸지만 고숙성 제품은 공식 위스키보다 더 저렴한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독립병입 위스키는 다채로운 레이블 디자인으로 위스키 마니아의 눈길을 끈다. 레이블에는 여러 정보가 담기는데 일부 제품들은 계약 문제로 증류소 명칭을 밝히지 않고 지역명만 공개하기도 한다. 독일 독립병입 브랜드 산시바의 사진 속 제품들도 증류소 명칭을 밝히지 않는데 전문가들은 레이블 속 그림들로 증류소를 유추하기도 한다. 또렷이 보이는 우측 세 제품의 원액은 맨 오른쪽부터 하이랜드 파크, 라가불린, 부시밀 증류소 생산으로 추정된다. 산시바 소셜미디어

독립병입 위스키는 다채로운 레이블 디자인으로 위스키 마니아의 눈길을 끈다. 레이블에는 여러 정보가 담기는데 일부 제품들은 계약 문제로 증류소 명칭을 밝히지 않고 지역명만 공개하기도 한다. 독일 독립병입 브랜드 산시바의 사진 속 제품들도 증류소 명칭을 밝히지 않는데 전문가들은 레이블 속 그림들로 증류소를 유추하기도 한다. 또렷이 보이는 우측 세 제품의 원액은 맨 오른쪽부터 하이랜드 파크, 라가불린, 부시밀 증류소 생산으로 추정된다. 산시바 소셜미디어

갑작스런 위스키 수요 증가로 시장이 과열되면서 독립병입 위스키 시장 또한 왜곡되는 양상을 보이는 점은 독립병입 애호가들이 우려하는 대목이다. 일부 소수의 마니아들이 사재기를 하며 불법 중고거래까지 서슴지 않고 있어서다. 천 대표는 “위스키 가격이 오르면서 ‘위스키가 돈이 된다’는 인식이 생기고 있는데 주류 중고거래는 불법인 만큼 투자하는 위스키보다 다양한 위스키의 맛을 즐기는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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