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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는 얼굴들

입력
2023.01.30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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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이사 레슈코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에 등장하는 생크추어리 동물들. 왼쪽부터 염소 '아베', 돼지 '바이올렛', 당나귀 '뱁스'. 가망서사 제공

이사 레슈코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에 등장하는 생크추어리 동물들. 왼쪽부터 염소 '아베', 돼지 '바이올렛', 당나귀 '뱁스'. 가망서사 제공

배우 김남길씨가 말 보호 운동에 나서 화제다. 퇴역 경주마 구조 활동을 돕고자 자신이 대표로 있는 문화예술단체를 통해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늙거나 다친 경주마는 운이 좋아야 승마장에 팔려 가고 대개는 폐사된다. 불법 도축도 적지 않다. 김씨는 말 타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경주마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1호 지원 대상은 지난해 여름 충남의 폐농장에서 구조된 '별밤'. 지금은 퇴역 경주마를 돌보는 제주 목장 '말 생크추어리'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 '피난처'라는 뜻의 생크추어리(sanctuary)는 폐사 위기에서 구조된 동물들의 보호 시설을 일컫는 말로 통용된다. 외래어 표기법과 달리 국내에선 보통 '생추어리'로 불린다. 1986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생크추어리를 만든 진 바우어는 "처음엔 '공장식 농장 경영'이 확산되는 걸 막고 피해 가축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고 시작한 일"이라고 회고한다. 관절염, 비만, 광장공포증 등 인간의 먹이사슬에 묶여 비좁은 우리에서 사육당한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긴 어렵다. 남은 생이나마 자유롭게 살도록 자연에 가까운 환경을 조성하고 돌볼 뿐이다.

□ 국내 1호는 '새벽이생추어리'다. 동물권 운동 활동가들이 2019년 7월 종돈장에서 병든 새끼 돼지 3마리를 '훔쳐' 달아난 게 계기였다. 앞서 활동가들이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며 돼지 도살장 앞에서 농성했을 땐 여러 번 업무방해 혐의로 신고당했지만, 막상 새끼들을 훔쳤을 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여겼을 터. 실제로 새벽이만 살아남아 이듬해 5월 생크추어리에 입주했다. 그해 11월 제주에선 프로골퍼 출신 김남훈씨가 말 생크추어리를 열었다.

□ 최근 출간된 '사로잡는 얼굴들'(가망서사 발행)은 생크추어리 동물 사진집이다. 작가 이사 레슈코는 10년 가까이 미국 전역의 생크추어리를 돌아다니며 닭, 돼지, 칠면조, 양, 염소 옆에서 빈둥거렸다. 동물들이 경계심을 풀고 카메라를 무심히 응시하길 기다리면서. 그렇게 건져 올린 초상 사진엔 더는 보통명사로 묶일 수 없는 동물 저마다의 고유한 표정이 담겼다. 이처럼 생명과 개성을 존중하는 다정한 호명이야말로 생크추어리의 본령일 것이다.

이훈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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