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베트남 반부패운동 후폭풍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베트남에서 살아 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격언을 입에 달고 산다. 개인사업이든 법인투자든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에서 행정 절차를 밟아 보면 격언의 힘이 즉시 체감된다. '업무 떠넘기기', '기약 없는 대기 통보'에 복장이 터지는 시간을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협상 기술을 동원해 적당히 '성의'를 보이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행정 절차가 물 흐르듯 진행될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베트남 공무원의 월급은 1,440만 동(75만 원)이 상한선이다. 공무원들이 박봉을 이겨내기 위해 다른 수입을 챙기는 것이 어느 정도 용인돼 있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는 베트남 국가경쟁력을 좀먹었다. 베트남은 국제투명성기구가 지난해 발표한 부패인식지수(CPI) 조사에서 87위에 머물렀다. 중국(66위), 인도(85위)보다 낮은 순위다. 1986년 개혁개방(도이머이) 정책 이후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이 아직도 '부정부패 척결'을 중앙 정부에 1순위 민원으로 넣는 건 괜한 트집이 아니란 얘기다.
제대로 불타는 화로, 권력 최상부까지 내치다
베트남 정부도 공직사회 부정부패의 해악을 모르지 않았다. 베트남 공산당은 2006년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등 척결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부정부패는 더 치밀하고 극악해졌다. 베트남 CPI는 2006년 111위에서 2008년 121위로 오히려 하락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한 베트남 정부는 2016년 '불타는 화로'라고 불리는 반부패운동으로 배수의 진을 쳤다. 칼을 뽑은 건 같은 해 연임에 성공한 응우옌푸쫑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이후 그는 집권 2기 5년 동안 작은 성과를 거뒀다. 국영정유회사 '페트로베트남' 횡령 사건 수사로 딩라탕 호찌민시 당서기장을, 국영통신사 '모비폰' 뇌물수수 사건 수사로 응우옌박선 정보통신부 장관을 기소했다.
자신감이 붙은 쫑 서기장은 3연임에 성공한 2021년 더 강한 불길로 화로를 달궜다. 스스로 '중앙 반부패 및 적극행동 지도위원회'(반부패위원회)의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공안, 군부, 검찰 등 힘 있는 기관장을 반부패위원회에 모두 모았다. 사정수사의 방향성만 정해지면 일사천리로 수사와 처벌이 이뤄지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반부패위원회의 힘은 막강했다. 2011년부터 9년 동안 연평균 1,388건에 불과하던 비리 공무원 기소가 2021년 한 해에만 4,200건으로 늘었다. 수치를 늘리기 위해 하급 공무원만 잡아들인 것도 아니다. 같은 기간 연평균 13명 안팎에 그쳤던 고위 공직자 징계 건수도 2021년 50명으로 증가했다.
가장 많은 인원을 처벌한 사정 수사는 '비엣 A'(Viet A) 뇌물수수 사건이다. 비엣 A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 3월 이후 중국산 저가 신속자가테스트 진단키트를 베트남 제품이라 속여 폭리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뇌물을 받고 비리를 묵인한 추응옥아잉 하노이 인민위원장과 응우옌타잉롱 보건부 장관 등 90명 이상의 공직자가 기소됐다.
베트남 반부패운동은 베트남인 특별입국 비리 사건 수사로 정점을 찍었다. 베트남 정부는 팬데믹 기간 귀국을 원하는 베트남인을 실어나르기 위해 2,000여 편의 전세기를 띄워 특별입국 절차를 밟게 했다. 이 과정에서 검은돈이 오간 사실이 지난해 드러났다. ATA투자컨설팅 등 특별입국 절차 진행 업체가 공무원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펼쳐 항공기 1편당 20억 동(1억1,700만 원)의 폭리를 취한 것이다.
사정당국은 공안부와 총리실을 가리지 않고 특별입국 비리 관련 전방위 수사를 벌였다. 실세 중의 실세였던 마이띠엔중 전 총리실 장관과 쭈쑤언중 하노이시 인민위 부위원장이 걸려들었다. 외교부에선 장·차관과 각국 대사를 포함해 12명이, 지방성 간부는 17명이 해임된 뒤 기소를 기다리고 있다.
불붙은 사정수사는 지난달 베트남 권력서열 2위 응우옌쑤언푹 국가주석의 사임까지 이끌어 냈다. 전 정권 총리(서열 3위)에 이어 주석 자리에 오른 최고 권력자라 하더라도 부정부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부패 척결의 그늘… 겁에 질린 공직사회 '행정 마비'
베트남 공산당의 메시지는 강렬했다. 뒷돈을 받는 데 주저함이 없던 공무원들은 일순간 복지부동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관례처럼 오가던 돈을 더 얹어 준다고 제안해도 손사래를 친다고 한다. 당장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공무원들이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몸을 똘똘 말았다.
겁에 질린 공직사회는 외국인에게 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언어가 통하는 베트남인들과의 부당 거래는 그나마 숨기 쉽지만, 외국인은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가장 큰 피해는 베트남 최대 진출·투자국인 한국의 15만 교민과 8,000여 개 한국 기업이 받고 있다.
한국인과 한국 기업의 투자 절차가 줄줄이 지연됐다. 수도 하노이 인근 하남시에서 공장을 운영 중인 A법인장은 "예정된 생산 시설 확충을 위한 서류를 넣은 지 세 달이 넘었지만, 담당 부서는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이미 원자재를 다 주문한 상태인데 피해를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기업인·전문가 입국 비자 문제도 심각하다. 북부 화빈성(省)의 B사 대표는 "통상 3주면 나오던 초청 비자가 두 달 넘게 발급되지 않아 매주 하노이를 찾아가 읍소하고 있다"며 "팬데믹 기간보다 행정 절차가 더 지연되는 바람에 새해 들어 부임해야 할 인력들이 아무도 입국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은 한국인들의 연이은 피해 호소에 분주하게 대처하고 있다. 대사관 관계자는 "피해 신고가 하루에도 수십 건 이상 접수되고 있다"며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 관계에 기반해 관계 부처에 상황을 설명하려고 해도 대화채널이 대부분 막힌 상태라 대처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이 부정부패 척결을 통해 체질을 개선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한국에 도움이 된다. 베트남은 '한국의 또 다른 경제 영토'로 자리 잡았고, 베트남보다 나은 조건을 지닌 투자·진출국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사정 정책 때문에 우호국의 국익이 지속적으로 침해되는 것은 당장의 후폭풍으로 남았다. 하노이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만난 한 교민은 이렇게 절규했다. "'한국이 우리 땅에서 성공하는 건 우리에겐 더 큰 성공'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베트남 공무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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