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정권 때 임신중지 합법이었던 폴란드
보수 정치권·가톨릭 손잡고 사실상 불법화해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도 논쟁적 이슈
'임신중지(낙태)는 죄'라고 믿는 가톨릭의 나라 폴란드에서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했다. 최근 10대 강간 피해자가 의료진의 시술 거부를 당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은 예외적으로 임신중단을 허용하고 있지만, 의사들은 '양심'을 명분으로 시술을 거부했다.
폴란드는 몰타와 함께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유이'하게 임신중지를 사실상 불법화한 나라다.
허용된 임신중지마저 "시술 거부"
30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삼촌에게 성폭행당한 후 임신한 10대 폴란드 소녀가 임신중지를 하려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거부당했다. 정신 장애가 있는 소녀는 이모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임신 사실조차 몰랐다. 이모 손에 이끌려 산부인과를 찾았지만 뜻밖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임신중지가 신념에 반한다면 시술을 하지 않는다는 '양심 조항'을 내세운 의사들이었다.
다행히 소녀는 여성인권단체 페데라의 도움으로 임신중지 시술을 받았다.
이후 폴란드에선 임신중지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불붙고 있다.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법 개정 움직임도 시작됐다. 좌파 성향의 가타르지나 코툴라 의원은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양심 조항은 폐기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도좌파인 바바라 노바카 의원은 "의료인의 양심 조항 사용을 제한하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산모 숨 넘어가게 생겨도… "태아가 우선"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엄격하게 임신중지를 금한다.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 △임산부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소녀의 사례에서 보듯 합법적 임신중지도 어렵다. 강간 피해자는 검사의 증명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안전한 임신중절 시기를 놓치기 쉽다. 폴란드인의 95%가 믿는 가톨릭은 임신중지를 죄악시한다.
여성들은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임신중절 시술을 받지 못한다. 2021년 임신 22주째 양수가 터져 입원한 이자벨라(30)는 임신중지 금지 때문에 숨졌다. 의사들은 "태아의 심장이 뛰고 있다"며 고열에 시달리고 구토를 하는 이자벨라를 방치했다. 이자벨라는 "임신중지금지법 때문에 태아가 살아 있는 한 의사들은 나를 돕지 않을 것"이라는 문자메시지를 가족에게 남기고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여성의 건강과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나곤 한다. 독일 베를린에서 폴란드 여성을 대상으로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사비네 뮐러 박사는 "기관지암을 앓고 있는 39세 산모가 임신중지를 위해 화학요법을 6주간 연기하고 내게 왔다"며 "폴란드 의사가 태아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암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매년 약 20만 명의 폴란드 여성이 위험에 노출된 채 '불법' 임신중지 시술을 받거나 해외로 나간다.
'전면 금지' 노리는 보수세력과의 긴 싸움
폴란드의 임신중지 논쟁은 생명을 건 긴 싸움이다.
한때 폴란드는 임신중지를 원하는 이웃나라 여성들이 찾던 나라였다. 공산 정권 시절엔 임신중지가 합법이었다. 1989년 공산당이 무너진 후 보수파의 독주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장기집권 중인 극우 성향의 '법과정의당(PiS)'과 임신중단을 죄악시하는 가톨릭교회는 임신중지 전면 금지화를 밀어붙였다. 1996년 이들의 첫 시도는 10만 폴란드 여성의 '검은 시위'에 가로막혔다. 2번의 입법도 좌절됐다.
이들은 끈질겼다. 2020년 10월 폴란드 헌법재판소는 기형아 임신중지를 허용한 법률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임신중지 전면 금지를 위한 초석을 놓은 셈이다. 이를 지지하는 폴란드인은 10명 중 1명꼴이지만 보수가 장악한 정치권과 사법부는 철옹성이었다. 유럽의회는 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폴란드 정부는 꿈쩍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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