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주택가 골목. 고만고만한 빨간 벽돌 빌라들 사이로 유독 흰 외관이 눈에 띄는 건물이 올라섰다. 강동한(37) 이혜연(38) 부부가 동네 자투리땅에 지은 협소주택(대지면적 81㎡, 연면적 173.46㎡)이다. 14평에 불과한 땅에 높이가 17m로 우뚝 솟은 주택은 근린생활시설(상가)과 주차장, 주거공간, 옥상 테라스와 수영장까지 알차게 갖췄다. 그야말로 '작은 저택'이다.
건축주 부부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아파트에서 살다 신혼집으로 빌라에 거주하면서 왜 선택지가 아파트와 빌라밖에 없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가 생기면서 오래전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주택에서의 삶을 꺼내보다가, 둘째가 태어나면서 협소주택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협소주택이라면,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면서 도시에서의 삶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죠. 그때부터 무작정 서울 내 작은 땅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자투리땅을 찾아 헤맨 지 2년 만에 부부는 결국 직장과 가까운 동네의 작은 대지를 찾았고, 책과 인터넷 자료을 섭렵하며 예비 건축주로서 공부도 시작했다. 그렇게 집짓기 준비가 제법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던 와중에 접한 이용의 건축가(공감건축사사무소 소장)의 협소주택 프로젝트는 부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소장은 2012년부터 수백 채의 협소주택을 설계한 이 분야 전문가다. 남편 강씨는 "소장님의 과거 프로젝트 가운데 중정을 갖춘 협소주택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며 "한 뼘이 아쉬운 작은 집에 정원을 넣을 정도의 과감함이라면 우리 땅에서도 맞춤 주택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스킵 플로어와 중앙계단, 작을수록 입체적으로
협소주택일수록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는 섬세한 터치가 필요한 법. 설계 시안을 수차례 바꾼 끝에 나온 안이 계단을 따라 공간을 엇갈려 쌓은 지금의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3층부터 5층까지 벽이나 칸막이 없이 연결하되, 반층 단위로 공간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스킵플로어' 형태로 만들었다. 이를테면 3층에는 주방과 거실을 배치하고, 계단을 따라 반 층 올라간 공간에 세탁실과 드레스룸을 들였다. 4층엔 안방을, 다시 반 층을 오른 5층에는 자녀방과 테라스를 뒀다. 건축가는 "협소한 건축면적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능에 따라 공간을 반 층씩 설계했다"며 "좁은 공간을 쓰임에 따라 분리하면서도 모든 층이 한눈에 들어와 채광 효과와 개방감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계단을 난간 대신 낮은 솔리드 벽체를 따라 곡선으로 연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1층에서 시작된 계단은 사과 껍질을 돌려깎는 듯 둥글게 말려 5층까지 이어지는데 풍부한 입체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상부가 트여 있어 시각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낸다. 집 전체의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를 관장하는 축이자 그 자체로 오브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건축가의 의도는 사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과도 맞아떨어졌다. 계단을 따라 공간이 들쑥날쑥하게 들어서다 보니 거리감이 생겨 실제 면적보다 넓고 아늑해 보인다. 아내 이씨는 "아이들이 4살, 6살로 어려서 한공간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데 벽이 없는 공간이 생활도 편리하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며 "움직임이 많은 우리 식구에겐 아주 제격인 공간"이라고 만족해했다.
'삼대'와 '육아', '주택'의 교집합을 찾아
이 집에는 부부와 어린 형제 외에 건축주 부모님이 함께 산다. 3~5층과 분리된 2층 공간이 바로 부모님의 생활 공간이다. 아파트 생활을 하던 부모님이 부부의 집짓기 프로젝트에 동참하며 주택 생활을 함께 시작하게 된 것. 이 소장은 "입구와 신발장은 같이 쓰지만 부모님의 공간과 부부 가족의 공간에 문을 달아서 완전히 독립된 구조를 계획했다"며 "육아를 함께 하지만 생활에선 최대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삼대가 각자 영역에서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으면 했다"고 설명했다.
이전 집에서 육아와 층간소음 문제로 늘 마음을 졸였다는 부부는 부모님과 한지붕 아래 살면서 많은 걱정거리가 저절로 해결됐다. "맞벌이다 보니 아무래도 육아며 살림이며 시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한건물에 살지만 완전 다른 세대로 영역이 분리돼 있다 보니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도 크지 않아요." 아내의 말이다.
1층에 들어선 작은 상가는 부모님을 위한 부부의 배려다. 남편은 "작은 규모라도 임대 수익이 있으면 은퇴한 부모님의 노후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며 "유동인구나 교통편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적더라도 꾸준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옥상은 부부의 로망이 실현된 공간이다. 지인을 초대해 같이 시간을 보내기 좋아하는 부부가 당초 꿈꾸던 집은 아이나 어른이나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터였다. 건축가는 그 바람을 담아 건물의 지붕을 걷어내 수영장을 만들었다. 휴양지에 놀러 온 듯한 분위기의 널찍한 수영장은 여름 한철은 아이들을 위한 풀장으로 쓰다가 평소에는 바비큐장 등 다양한 외부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가장 애정하는 장소로 옥상 테라스를 꼽은 남편은 "협소주택에서 말하는 '협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공간이 180도 달라진다"며 "작지만 큰 공간을 만드는 것은 사는 사람의 상상력에 달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은 집이 보여주는 가장 큰 세계
내 집을 마련하려면 아파트나 빌라 말고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기 어려운 도시, 서울. 이곳에서 두 아들을 키우는 젊은 직장인 부부에겐 넉넉지 않은 예산으로 도시 한가운데 집을 짓고 사는 모든 과정이 도전이자 모험이었을 터.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래 지인들에게 그래서 이 집은 말그대로 '모델 하우스'로 통한다고 한다. 아내는 "결과물이 대단해서라기보단 이런 집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로 주변에 희망을 주는 것 같다"며 "실제로 살아 보니 획일화되고 몰개성적인 아파트나 빌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즐거움이 있긴 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과감히 실행했던 첫 주택살이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남편은 벌써 두 번째 집짓기를 꿈꾸고 있다. 그는 "막연히 생각만 하지 말고 뭐라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정된 예산 안에서도 선택과 집중을 잘하면 충분히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땅이든 집짓기는 가능해요.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전에 경험한 적 없는 가장 큰 세계를 보여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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