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복수보다 용서', 익숙한 종교적 서사
기독교·천주교·불교 3색 '분노와 치유'
편집자주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현대인의 숙제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이후엔 우울증세를 보인 한국인이 36.8%에 달하는 등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졌죠. 마찬가지로 우울에피소드를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 기자가 살핀 마음 돌봄 이야기를 전합니다. 연재 구독, 혹은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취재, 체험, 르포, 인터뷰를 빠짐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총도 칼도 없고 유혈이 낭자하지 않는데 등골이 서늘합니다. 넷플릭스 새 드라마 '더 글로리'의 얘긴데요. 가해자들을 턱 밑까지 쫓는 복수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분노와 복수, 증오를 잘근잘근 곱씹게 됩니다. 가해자는 결코 모를 상처와 비참한 일상에 신음하는 피해자 송혜교(문동은 역)를 화면으로나마 지켜본 마음은 어땠나요. 유사한 가해가 나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참담함에 우리 일상도 동은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흉흉한 날들이었을 겁니다.
진부하긴 합니다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동은은 연진(임지연)을 용서할 수 있을까.
복수를 보는데 용서를 함께 떠올린 이유는 뭘까요. 진부하다는 전제까지 깐 이유는 우리가 본 수많은 복수 시리즈의 서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용서'였기에 그럴 겁니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도 함께 엮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 국내 내로라하는 영화 거장들의 복수 시리즈는 골몰하는 복수의 종착역을 영광과 완성이 아닌 허탈과 자기 파괴로 그리곤 했죠. 막장을 치닫는 TV 드라마 속 복수가 대부분 비참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복수보다 용서' 이야기는 종교적 서사에서 더 두드러집니다. 복수와 응징이 아닌 용서와 회개를 통해 죄를 씻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 전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넘쳐납니다.
오늘 '에코의 마음청소'는 종교가 분노와 사랑 그리고 치유를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3대 종교인 기독교·천주교·불교가 분노와 복수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 너머의 치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한번 보실까요.
무분별한 화해와 용서, 또 다른 트라우마로
우선 기독교계 시선을 알아보기 위해 책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되는가'를 살펴봤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규보 총신대 상담대학원 교수는 "기독교 전통은 현대적 의미의 트라우마(외상)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섭리 아래 고난'이라는 개념을 통해 트라우마를 이해해왔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고난에 빠뜨리는 '악'은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요.
다만 고난을 어떤 사람의 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건 옳지 않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고난은 우리의 죄가 아닌 타인의 죄로 인한 것도 있고, 그 죄들이 만들어 낸 사회 문화 시스템으로 인한 것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무작정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저자에 따르면 이는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책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영적 승리주의의 형태"라며 "비극과 고통은 표현돼야 하고 그 소리는 들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분노와 애통의 표현은 고난의 상황 속에서 정직한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믿음의 외침"이라고까지 합니다.
물론 '용서'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 중 하나인 것은 맞다고 해요. 용서하지 못함은 결국 우리를 미움과 분노, 복수심의 소용돌이에 묶어 버리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무분별한 화해는 오히려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용서는 크게 △법정적 용서(하나님께 맡기기), △심리적 용서(부정적 감정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놓아주기), △관계적 용서(진정한 사과, 책임 있는 변화, 적절한 배상)로 구분해 실천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다만 자기 유익을 위해 피해를 과장하거나 과도한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분노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되 자신을 먼저 용서
천주교의 시선도 기독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언회 사제이자 심리학자인 마르틴 파도바니는 책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에서 "하느님은 선을 원하지만 악도 허용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며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을 간섭하지 않으며 우리를 하느님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악과 하느님의 공존(?)이라는 영원한 난제가 시작된 이유죠.
책은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악에 대처하기를 원한다"며 "불의의 사고는 하느님이 뜻한 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사건을 통해 성장과 성화의 계기로 삼기를 원한다"고 얘기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있는 그대로 직면하되, 악을 묵인하라는 건 아니고 그것에 과감히 맞서서 가능하다면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는 거죠.
우리의 운명은 예정된 것이나 운명적 사건에 수동적으로밖에 대처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미사 전례 안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불확실함, 모호함, 좌절 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범하는 지와 잘못으로 빚어진 결말조차도 우리가 직면하고 수용해야만 하는 새로운 현실이 됩니다.
책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중
그렇다면 치유로는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책은 "분노, 불안, 부정적 사고에 대응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방법은 표출"이라며 "무엇보다 자책을 멈추고,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상황과 환경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기 위해 외부로 눈을 돌리라고 합니다.
천주교와 기독교에서는 신에게 기도를 하죠. 파르바니 사제는 "기도는 남을 탓하거나 어두운 세력을 저주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시간"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러면서 "고통을 겪는 동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더 심오한 의미를 모색해야 한다"며 "우리는 치유를 경험하고 우리가 의미를 찾아낼 때 희망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분노를 알아차리고 번뇌를 제거
그렇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에서는 어떻게 얘기할까요. 하유진 서강대 철학연구소 교수는 자신의 논문 '분노에서 자비로-불교에서 마음을 치유하는 법'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불교에서는 분노에 대해 "우선 현재 나에게 분노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 다음 분노의 자리를 선한 마음으로 대체하라"고 합니다. 불교계에서는 "짜증과 화를 다스릴 때 일상의 괴로움을 줄일 수 있다"며 "그래야 괴로움이 소멸되고, 나아가 안정과 행복과 평온을 경험할 수 있다"고 바라봅니다.
이에 따르면, 분노는 '어리석은 마음에 근거해 작동하는 번뇌'인데, 분노를 분명히 알아차려야 내 마음이 더 이상 화에 끌려다니지 않고 그 자체에 머물 수 있다고 합니다. 분노의 대상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분노하고 있는 '내 마음'을 대상으로 보는 것. 그로부터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붓다는 나아가 악의와 적의를 제거하는 '사무량심'을 강조하는데요. 원한이 생기면 5가지 방법으로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자애, 연민, 평정, 기억하지 않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그것이죠.
그렇다면 사랑의 마음인 자애심, 곧 자비는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미워하는 생각을 제거하는 '자심'과 번거롭다는 생각을 제거하는 '비심', 함께 기뻐하지 못함을 제거하는 '희심', 사랑도 미움도 제거하는 '사심'을 통해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에서도 분노를 양면적인 대상으로 본다는 건데요. 논문은 "분노는 수행에서 대치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번뇌'임과 동시에 깨달음을 성취하는 '자양분'으로 기능한다"며 "즉, 분노는 수행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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