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한 여자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백설공주의 마녀 계모는 매일 요술 거울에게 이렇게 묻는다. 늘 '답정너'식 대답을 들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살던 그녀는 결국 백설공주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듣고 극도의 분노와 질투를 느낀다. 동화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독특하고 희귀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최강의 나르시시스트, 최초의 패션모델, 사진 예술계의 아트 디렉터, 남성을 사로잡는 신비로운 팜 파탈이자 고급 매춘부, 그녀는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즉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다. 위 작품은 19세기의 유명 초상화가 미켈레 고르디자니(Michele Gordigiani)가 그린 올도이니의 25세 때 초상화다. 어깨가 드러난 흰색 드레스에 검정 레이스 숄을 걸치고, 진주 목걸이, 황금 팔찌, 데이지 꽃장식 헤어핀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눈부시게 흰 피부와 장밋빛 뺨을 가진 그녀는 엇비스듬히 서서 다소 차갑고 자부심에 찬 눈빛으로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나, 예쁘지?'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탈리아의 진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다. 물결 모양으로 곱슬곱슬한 길고 탐스러운 금발, 희고 섬세한 타원형 얼굴, 녹색에서 맑은 파란색으로 변하는 매혹적인 눈을 가진 올도이니는 '비너스가 올림포스에서 내려왔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집착했고 거의 병적으로 허영심이 많았다.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패션으로 단박에 파리 사교계의 스타가 된 올도이니는 나폴레옹 3세와의 불륜, 지나친 사치, 이혼 스캔들로 악명이 높았다. 남편과 헤어진 이후엔 파리에서 저명한 귀족, 금융가, 정치인과 교류하면서 엄청난 화대를 받는 고급 매춘부로 살았다.
올도이니는 셀카(selfie)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1856년에서 1895년까지 약 40년 동안, 사진작가 피에르 루이 피에르송과 협업하여 700점이 넘는 독창적인 사진 자화상을 제작했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스스로 신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단순히 사진 모델로서가 아니라 아트 디렉터처럼 행동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백작 부인이 사진을 직접 찍지 않았고 전문 사진가가 촬영해 주었기 때문에 셀카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녀는 평범한 뮤즈나 수동적인 모델이 아니었다. 촬영 시작에서 끝까지 피에르송에게 어떤 콘셉트로 찍을 것인지 세세하게 지시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으니 셀카와 다르지 않다. 무대, 다채로운 포즈, 표정의 설정, 의상 선택 및 촬영 각도 모두 올도이니가 주도면밀하고 까다롭게 연출, 감독했고, 그녀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모델이나 배우처럼 연기를 했다. 올도이니는 사진 속에서 유디트, 맥베스 부인, 앤 불린, 메데이아, 수녀, 매춘부, 하트의 여왕, 심지어 관 속의 시체 등 다양한 성서와 신화, 문학 작품 속 인물로 변신했다. 사진 인쇄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때때로 그림을 그려 사진을 수정하기도 했다.
노화와 미모의 쇠락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사진을 통해 그토록 열정적으로 자기애를 분출했건만, 그녀 역시 시간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다. 허영의 장미는 너무나 빨리 시들었고, 별똥별은 잠깐 빛나고 추락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에게도 미모의 시간은 한시적이다. 백작 부인의 말년은 매우 슬프고 어두웠다. 파리 방돔 광장에 있는 아파트에서 죽는 순간까지 정신적으로 몹시 불안정하고 기괴한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지냈고 거울은 모두 없애버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거울이 확인시켜 주는 신체의 노화와 아름다움의 상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고 밤에만 가끔씩 베일로 온몸을 가린 채 집에서 나갔다.
1890년대에 제작된 최후의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오는 그녀의 정신적 문제를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세월을 수용하고 주름과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외모의 아름다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노년기에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다. 올도이니는 1900년 만국박람회에 '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제목의 사진 전시회를 열어 자신의 사진을 선보이는 꿈을 꾸었지만 이루지 못한 채 1899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살아있을 때도 악명이 높았지만, 사후에도 그녀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신문들은 그녀의 부고 기사에 허영심과 오만에 쩐 나르시시스트가 사망했다고 썼다.
올도이니에게 카메라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표현하는 최적의 도구였던 것 같다. 현대인은 휴대폰 카메라를 이용한 셀카의 홍수를 경험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자가 초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영어 신조어 셀피, 혹은 우리말로는 셀카로 불리는 이 단어는 현대인의 생활을 묘사하는 핵심어 중 하나일 것이다. 옛 화가들이 모델의 외모를 실물보다 미화해 그렸듯이, 현대인은 온갖 보정 앱의 도움으로 딴 사람같이 보이는 셀카 사진을 만들어낸다. 셀카는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더 낫게 포장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욕망에 이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나르시시스트로 만들었다. 셀카의 이면에는 '나는 중요해!'라는 자기애와 '날 사랑하고 추앙해!'라는 인정 욕구가 내재돼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올도이니의 후예다. 그녀만큼 지독한 나르시시스트가 되기는 쉽지 않을 테니 좀 더 '온건한 후예'라고 해두자.
올도이니는 갖가지 드레스를 입고 다양한 포즈로 찍은 자신의 사진 앨범을 연인과 추종자들에게 보냈다. 당시엔 별쭝난 짓으로 여겨졌지만, '셀카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SNS를 통해 다들 자기 사진을 사람들에게 퍼트린다. 그녀가 한 세기 후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 시대에 살았다면, 할리우드 여배우나 모델, 적어도 수많은 팔로어를 가진 패션 블로거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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