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국민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사망하는 현실. 그러나 연명의료기술의 발달은 죽음 앞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봉사자를 '어머니'로 삼은 고아 암환자
'영적고통' 돌보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누구나 시한부 삶, 죽음 의미 되새겨야
20대의 젊은 청년이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 그 환자는 고아로 보육원에서 성장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기에,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가족 대신 간병을 해주고 있었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한 중년의 여성 봉사자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그를 돌봐주었다.
암이 진행되면서 전신 상태가 나날이 나빠져 가던 어느 날, 환자는 호스피스의 수녀님에게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저를 돌봐주던 봉사자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봐도 될까요? 태어나서 한 번도 어머니라는 말을 못 해봤는데 죽기 전에 해보고 싶어요" 그 소원은 봉사자에게 전해졌고, 그녀도 흔쾌히 환자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환자는 그 봉사자를 '어머니'라 불렀고, 임종하는 날에는 그녀가 환자를 껴안아 주자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호스피스 수녀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머니'라는 말처럼 대부분 사람들이 당연히 소유하고 누리는 일을 어떤 이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해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거나, 그 상처를 간직한 채로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암 환자들이 사회복지사와 상담한 기록을 읽어 보면, 환자들이 암이라는 질병뿐만이 아니라, 가까운 가족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로 생긴 아픔을 함께 앓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존재하지만 연락해도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배우자나 자식을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다고 호소하는 독거노인도 있고,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간병하고 있는 실질적인 배우자이지만 이름을 호적에 올리지 못해 아무런 권리 행사도 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환자들은 대부분 가깝게 지내던 가족이나 친구를 보고 싶어 하거나, 풀지 못한 갈등으로 사이가 멀어진 사람을 죽기 전에 만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혼 후 부모님의 간병을 받던 30대 중반의 남자 암 환자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연락이 끊어진 전 부인을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호스피스 봉사자에게 이야기했다. 봉사자는 환자 부모님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으나, 이혼한 며느리를 용서할 수 없었던 노부부는 끝내 아들이 전 부인을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을 품고 죽는 것은 좋은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 아쉬운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 중에는 육체적 통증보다, 이런 일들로 더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지만 첨단 의료기술로도 치료할 수 없고, 진통제 처방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의 육체적 통증뿐만 아니라, 영적인 고통까지 보살펴주려는 전인적 접근을 위해 호스피스-완화의료라는 형태의 의료가 도입되었다.
환자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이 찾아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임종 전 부모님을 간병하면서, 평생 동안 한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런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어요."
어떤 다른 전공과목의 의사보다 더 많은 환자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임종이라는 슬픈 이별의 순간이 떠나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의 따뜻한 화해와 치유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회한과 원망으로 가득한 시간이 될 수도 있음을 보았다.
잊고 살지만, 말기 암 환자가 아니어도,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죽음이 삶의 완성이 될 것인지, 삶의 실패가 될 것인지 그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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