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100일, 이태원은 지금]
여전히 썰렁... 상권회복 조짐 안 보여
당국 지원 시늉만 "실질적 도움 안 돼"
상인·시민 주도로 '되살리기 프로젝트'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됐습니다.”
2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서울 용산구 이태원1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권구민(29)씨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5일이면 참사 발생 100일이 된다. 하지만 이태원 상권은 좀처럼 기지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840일 만에 마스크 착용 의무에서 벗어나 일상회복을 향한 온 국민의 설렘도 이곳에서는 남의 나라 일이다.
이날 찾은 세계음식문화거리는 한산했다. 추모 공간이 마련된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만 추모객들의 발걸음이 이따금 이어질 뿐이었다. 상인들도 저녁 장사에 기대를 접은 듯했다.
100일 지나도 매출·유동인구 회복 난망
지난해 6월 영업을 시작한 권씨는 참사 전후 변화를 절절히 체감한 장본인이다. 한때 1억 원을 찍던 월 매출은 그해 11월 300만 원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최근 조금 나아진 게 1,700만 원 수준이다. 그는 “월세가 1,100만 원이라 직원 월급을 주면 남는 게 없다”고 했다. 14명이던 가게 직원은 2명으로 줄었다. 파티룸이나 스튜디오를 빌려주는 공간대여 사업을 하는 박모씨도 “나라 전체가 승리의 기쁨에 들썩였던 월드컵 때도 이태원은 적막한 공간이었다”고 씁쓸해했다.
상권 침체는 수치로 확인된다. 서울시에 따르면 올 1월 첫 주 이태원1동 상권 매출(BC카드 기준)은 참사 직전인 지난해 10월 마지막 주보다 54% 감소했다. KT 기지국을 토대로 집계한 유동인구 역시 30% 넘게 줄었다. 참사 골목에서 약 1㎞ 거리의 ‘경리단길’ 상권이 있는 이태원2동이 조금씩 회복 조짐을 보이는 것과도 대조된다. 이날 이태원2동에서 만난 한 시민은 “경리단길은 자주 오는데 솔직히 이태원1동은 아직 가기가 꺼려진다”고 털어놨다.
정부·지자체 각종 지원책 내놨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손 놓고 있진 않았다. 참사 직격탄을 맞은 상인들을 돕기 위해 저리 대출 상품 등 각종 지원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별 도움은 안 된다는 반응이 많았다. 어차피 갚아야 할 돈이라 ‘급한 불만 끈 수준’이라는 것이다. 매진 행렬을 이어가는 다른 지역 상품권과 달리 용산구가 지난달 발행한 100억 원 규모의 ‘이태원상권회복상품’은 고작 15%만 팔렸다. 상인 박모씨는 “정부 대출은 재해확인증이 필요한데 발급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하다”며 “참사 지역 일대 상인들만 집중 지원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출 대상 지역을 이태원 1ㆍ2동으로 한정했다가 수㎞ 떨어진 서빙고ㆍ용산2가동까지 확대한 바람에 지원 효과를 피부로 느낄 수 없다는 볼멘소리였다.
지자체의 배려도 아쉽기만 하다. 서울시는 지난달부터 대출한도를 2억 원으로 늘린 소상공인자금 지원 신청을 받고 있지만, 상인들 대상 홍보에는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용산구가 이달 1일부터 운영하겠다던 심리상담소 개소 역시 연기됐다는 소리만 들릴 뿐, 별다른 공지는 없다. “애도기간 중 영업 중단을 독려하러 구청 직원들이 ‘가가호호’ 돌아다닐 때와 너무 비교된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어떻게든 이태원의 명성 되찾을 것"
위기 극복은 결국 상인들 몫이다. 어떻게든 떠난 이들을 다시 불러 모으려 여러 묘안을 짜내고 있다. 특구연합회 주도로 60개 식당은 지난달 19일부터 10~30% 할인 행사에 들어갔다. 이미 적자라 더 싸게 파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만큼 절박하다. 상인 A씨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이태원이 안전하고, 상인들도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4, 5일 이태원 일대 클럽에서는 ‘렛 데어 비 러브(사랑이 자리 잡기를), 이태원!’이라는 제목의 추모공연도 열린다. 2017년 영국 맨체스터 테러 참사 보름 뒤 같은 장소에서 열린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자선공연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한 행사다. 재즈바 사장 황순재씨는 “상처와 슬픔을 이겨내고 이전의 이태원으로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말했다.
시민들도 상인들의 고군분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자발적으로 이태원 맛집을 공유하며 방문을 독려하는 이용자가 부쩍 늘었다. 상인들에게 에델바이스꽃을 나눠주며 위로하는 이태원 토박이 대학생도 있다. 에델바이스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과 ‘용기’다. 이 대학생은 “참사 현장에서 많은 이들을 살리는 데 헌신한 상인들이 아직도 생활고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얘기를 듣고 나섰다”며 “그분들께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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