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드레스덴 폭격
2차대전 ‘드레스덴 폭격’을 몇 차례 언급했다. 폭격 잔해 속 벽돌들을 간직했다가 종전 60년 만에 드레스덴 성모교회를 복원한 시민들 이야기,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의 실험적 반전소설 ‘제5도살장’과 전후 미국의 소설과 역사 지우기 논란. 그리고, 체코 프라하를 드레스덴으로 오인 폭격한 미 육군항공대의 치명적인 ‘실수’.
당시 공군 레이더와 항법장치는 허술했다. 폭격 지점을 잘못 찾기 일쑤였고, 반환점을 지나쳐 연료 부족 등으로 추락하는 일도 잦았다. 방공망을 피하기 위한 야간 폭격 때는 시각적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해서 만들어진 게 ‘패스파인더’ 편대(PFP)였다. 원래 공수부대가 작전 지역에 미리 침투해 수송기 착륙지나 낙하지점을 표시하는 임무를 맡던 부대인데 공군에도 편성된 것. 최정예 파일럿들로 편성된 패스파인더 편대는 사전 목표지역에 접근, 조명탄이나 육상 및 공중 ‘컬러 마크’를 투하해 폭격기 조종사들을 목표지점으로 인도했다.
유럽전쟁 종전 막바지였던 1945년 2월 13일 저녁, 단 한 번도 전략폭격을 당하지 않아 방공망도 무척 허술했던 독일 드레스덴 상공에 패스파인더 편대가 나타났다. 영국 공군사령부 소속 ‘블라인드 일루미네이터’ 편대의 소규모 폭격과 ‘비주얼 마커’ 편대의 소이탄, 표적 마커 투하 직후 본격적인 전략폭격이 시작됐다. 영미 연합군은 15일까지 사흘간 폭탄 2,700톤을 포함 소이탄 등 폭발물 약 3,400톤을 도심 약 20.7㎢ 공간에 퍼부었다. 폭격과 열폭풍에 피란민을 비롯한 민간인 2만2,700~2만5,000명이 숨졌고, ‘엘베의 피렌체’라 불리던 중세 바로크 건축과 예술의 도시 드레스덴은 폐허가 됐다.
독일 교통망 파괴라는 당시 연합군의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벌지전투에 대한 보복성 민간인 학살 등 저 전략폭격의 의도와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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