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클리닉에서 만난 팀장 2년차 직장인이었다. 잠을 못 자고, 숨차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내과에 들렀다가 나를 소개받은 분이었다. 팀원들에게 일을 배분하고 관리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는데, 새로 시작하는 친구들이 많다 보니 가르칠게 너무 많았다.
일의 순서며 파일 정리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가르쳐 주다 보니 주말에도 연락해서 수정 사항을 알려주기도 했다. 하도 답답해서 화는 좀 냈지만 그래도 본인이 당했던 것처럼 하지 않으려고 막말한 적도 없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후배 한 명이 다가와 ‘팀장이 너무 심하게 하니까, 팀원들이 다들 힘들어한다고, 이젠 좀 살살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들 잘 되라는 의미로 한 것이었는데 갑질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정말 갑질이 아니었을까?
갑질은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우월한 지위나 직급을 이용해 무례한 행동을 하거나 하인 다루듯 함부로 구는 행동을 말한다. 말로 괴롭히는 정신적 폭력, 또는 우월적 위치에서 말로 상처주기 등도 포함된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들 삶에 갑질로 분류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맘에 안 든다고 종업원과 가게 주인에게 막말하면서 인격적인 하대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의사와 잘 면담하고 나가다가 간호사에게 막말하고 가버리는 분들도 있다.
사회 속 인간관계는 노동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계약관계를 전제로 한다. 아랫사람 행세를 하거나 굽신거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라는 이유 혹은 월급을 준다는 이유로 본인이 수준 높은 윗사람인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밖에서는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인격적으로도 존경받는데, 유독 내 가족에게만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갑질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공감을 배우지 못한 경우에 발생한다. 본인이 평소 겪은 울분과 열등감을 가정이나 회사의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화풀이하는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다. 어쩌면 사회생활의 기본 예의와 규칙을 배우지 못하거나 머리가 나빠서 그럴 것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매주 모여 식사를 하고, 일사분란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보이는 가족 뒤에는 누군가 한두 명의 인내와 희생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 피해자는 종국에 만성 우울증이나 홧병으로 고생한다. 잘 굴러가는 것 같이 보이는 회사에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마음 고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명심보감은 동양고전의 좋은 글들을 모아 수신(修身), 즉 인격 수련을 위해 읽던 책이다. 안의편(安義篇)에서는 인간관계가 빈부를 초월한다고 말한다. 또, 준례편(遵禮篇)에서는 가족ㆍ친척ㆍ직장에서도 예의가 중요하며, 심지어 전쟁을 할 때도 예의가 있음을 말한다. 언어편(言語篇)은 적절한 예의과 존중을 위해서 말의 책임을 지고 말함에 있어 삼가야 함을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족과 동료를 서로 존중하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예의를 지키는 것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가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내 가족과 동료는 남이 아니고 내 식구니까 편하게 해도 된다고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친하자고 허물없이 하는 이야기니까 섭섭해하지 말라고도 하지 말자. 각자 독립적인 삶의 영역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서로 예의를 지키는 가족이 가장 화목한 가족이다. 내 가족이 밖에서 갑질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 바란다면 집안에서 그렇게 대우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본인의 성격상 내 동료, 내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고 삼가는 걸 도저히 못하겠다면 방법은 하나다. 차라리 남이라고 생각하라. 어울려서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그저 다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족에겐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남보다 조금 더 친한 남이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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