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신속하지 못한 ‘신속전력화’
중소기업 A사, 이미 2020년 군에 시제품 납품
군사적 필요 인정됐으나 전력화 절차 계속 지연
그러다 북 무인기 침범... 신속사업에 '시한' 없어
결국 군이 한수원서 동일한 장비 대여하는 촌극
편집자주
한국 방위산업은 전투기ㆍ전차ㆍ자주포 쪽에서 수출 대박을 터뜨리며 전성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높은 가성비, 양산 능력, 검증된 안정성이 국산 무기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정작 기술력을 갖춘 국내 IT기업이 국내 방산에 진출해 국군에 신무기를 납품하는 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신기술이 신무기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한국일보가 점검해 봤습니다.
“군이 서둘렀다면 북한 무인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무인기 막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에 있었으니까요.”
안티드론(나쁜 드론 무력화) 기술을 갖춘 스타트업 A사의 대표 G씨는 지난해 말 북한 무인기 침범 소식을 들었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고 한다. A사는 드론 차단 장비를 자체 개발한 회사였고, 경찰청에 납품할 정도로 기술력도 입증받았다.
안티드론 기술은 ①공중 물체를 탐지해 ②새인지 드론인지를 식별한 뒤 ③방해전파를 쏴 차단하거나(소프트킬) 대공무기로 격추(하드킬)하는 능력을 말한다. A사는 소프트킬이 가능한 다수 제품군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이 기술과 관련해 방위사업청에 의해 신속시범획득사업 사업자로 지정된 곳이다.
그러나 군은 이번 북한 무인기 사태에서 안티드론 기술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고, 수도 한복판 하늘까지 내주고 말았다. 써먹을 수 있는 민간의 신기술이 있어도 군 장비로 제때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 어떤 장애물이 신기술의 무기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신기술이 신무기가 되지 못한 사연
G씨는 "우리 군이 늦어도 2021년부터 안티드론 장비를 정식 전력으로 활용할 기회가 있었다"고 말하며 2019년 11월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방사청은 A사 등 10여 개 업체를 불러 '신속시범획득사업'이란 제도를 소개했다. 신속시범획득사업은 방사청이 2020년 1월부터 정식 시행한 제도다. 민간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군이 시범으로 운용한 후, 군사적 필요성이 인정되면 신속히 전력화한다는 취지였다.
방사청은 당시 “시제품 납품을 위한 시범사업자를 뽑을 때는 경쟁입찰을 하고, 후속 양산사업 땐 수의계약을 할 것”이라고 했다. 방사청은 A사 등에 ‘후속사업 시 수의계약’의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공문으로도 안내했다.
G씨는 확신을 갖고 사업 참여를 결정했다. 제안서엔 재료비만 써냈다. 손해 보는 값이었으나 수의계약에 따른 양산이 이어지면 비용을 보전할 수 있다고 봤다. 2020년 여름 시범사업자가 됐고, 가을에 바로 시제품을 납품했다. 6개월간 군의 시범운용이 끝난 2021년 상반기엔 군사적 활용성까지 확인됐다. 군의 전력화 결정과 양산 계약만 남겨 둔 상황이었다.
'신속' 사업인데 시한이 없다
그러나 신속사업은 신속함과 거리가 멀었다. 시범운용을 끝낸 A사 제품이 양산계약 전 단계인 전력화 결정을 받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신속사업임에도 절차의 신속성을 보장한 규정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당시 업무관리지침을 보면, 방사청은 시범운용 종료(군사적 활용성 확인) 후 1개월 내 사업종결보고서를 작성해 군에 통보해야 한다. 그다음 군은 정식 전력화 결정 및 수요제기(소요제기)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군이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언급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A사는 방사청과 양산 계약서에 도장을 못 찍었고, 결과적으로 군은 북한 무인기 침투 때 안티드론 제품을 쓰지 못했다.
군이 시간을 끈 이유는 안티드론 기술 자체를 가볍게 봤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장원준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통상 전투기, 함정 등 대형장비에 대한 군의 긴급소요는 중시되지만 안티드론 같은 소규모 비대칭 전력 사업은 우선순위가 매우 낮다"며 "전력화 결정에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라고 말했다.
군, 사건 터지자 한수원서 장비 대여
방사청과 군이 시간을 끄는 동안 A사가 기술 개발과 보완에 들인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여전히 미계약 상태인 현재까지, A사가 들인 매몰 비용은 최소 20억 원가량이다. 연평균 매출의 절반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A사는 의외로 다른 곳에서 성과를 거뒀다. A사가 군에 보낸 시제품과 똑같은 장비가 중소벤처기업부의 혁신제품으로 선정돼, 2021년 여름 한국수력원자력에 납품됐다. 납품 시엔 혁신제품 선정에 따른 혜택으로 수의계약을 맺었다. 이 제품은 원전시설에 침투하는 드론 차단용으로 쓰이고 있다.
A사 제품은 2021년 말이 되어서야 군 전력화 결정이 났지만, 시간 끌기가 또 이어졌다. 방사청은 지난해 상반기가 돼서야 후속 양산을 위한 사업설명회를 열었는데, 여기서부턴 계약 조건 변경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애초 방사청이 공문으로 안내한 ‘후속사업 시 수의계약’ 내용은 사라졌고, 시범사업자 선정 때와 똑같은 ‘경쟁 입찰-최저가 낙찰’ 방식이 그 자리를 채웠다.
A사는 당초 약속했던 양산계약 방법과 다르다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 이상 흐른 지난해 말 경쟁입찰 공고가 났다. 그렇게 안티드론 전력화가 지연되고 있던 지난해 12월, 북한 무인기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했다. 사고가 터지고 여론이 분노하자 그때서야 군은 부랴부랴 A사 제품을 찾았다. 한수원에 연락해 "A사의 안티드론 장비를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군이 신속시범획득사업을 통해 시범운용하던 바로 그 제품이다. 장비 번호까지 동일했다.
작전용 장비를 시범운용까지 해놓고 정식 전력으로 확보하지 못해 공기업에서 빌리는 촌극을 연출한 것이다. 본보가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입수한 당시 군의 공문을 보면 "상황의 긴급성을 고려해 최대한 빠른 시간 내 대여 및 운용할 수 있도록 조치 바란다”는 내용이 있다. 시간을 끌던 군이 사태가 터지고서야 갑자기 '속도'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방사청과 군의 무인기 대응을 위한 전력화 사업이 총체적 난국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이런 고초를 겪은 것은 A사만이 아니다. A사처럼 시범사업자 자격으로 시제품을 납품한 정보통신(IT) 업체 B사 또한 2021년 중반 전력화가 결정됐지만 양산 사업 유찰로 하염없이 방사청과 군만 바라보고 있다. 연이은 입찰 과정에서 진행한 구매시험평가비용 10억 원은 B사가 모두 부담했다. 방사청은 무기체계 구매사업에서 구매시험평가 비용을 업체에 부담하도록 한다. B사의 부채는 2020년 11억 원에서 2021년 19억 원으로 늘었다.
방사청 "속도 높이려 제도 개선 중"
신속사업이 신속하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 방사청은 "통상 무기체계 획득이 10년 이상 걸리지만, 신속시범획득사업의 경우 긴급소요(소요 결정 후 2년 내 전력화)로 결정돼 사업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또 “현재 절차를 더 빠르게 하고자 법령 개정 등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A사가 겪고 있는 고충과 관련해선 2019년 11월 "후속사업 시 수의계약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공문으로 안내한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이듬해 이 제도를 정식으로 시행할 때는 경쟁 계약에 의한 최저가 낙찰의 양산사업 추진을 확정했다는 입장이다. 방사청 관계자는 “제도 도입 때부터 업체들에 이 사실을 충분히 안내해서, 업체들도 후속사업이 경쟁입찰로 진행됨을 인지하고 참여했다”고 밝혔다.
신속시범획득사업이란
신속시범획득사업은 방위사업청이 주관해 민간의 창의적인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구매하여 군 시범운용(시제품 사용) 후, 소요결정과 연결해 후속물량(양산품)을 신속히 전력화하는 사업으로 2020년 1월 도입됐다. 이를 위해 방사청은 2019년 1월 신속시범획득사업 업무관리지침을 제정하고, 같은 해 11월 방위사업법의 행정규칙인 방위사업관리규정을 개정해 사업 시행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전반적인 사업 절차는 '시범사업자 선정 및 계약 → 시제품 납품 → 시범운용 → 군 소요 결정 → 후속사업(양산)'이다. 방사청은 시제품의 경우 6개월 내 납품을 원칙으로 하나, 제작 난이도 등을 고려하여 최대 12개월까지 납품기간을 설정하고 있다.
지난 1월 방사청은 기존의 신속시범획득사업 업무관리지침을 폐지하고 신속시범획득과 신속연구개발로 분리돼 있던 규정을 '신속시범사업 업무관리지침'으로 통합해 시행 중이다. 2월 1일부터 해당 지침에 따른 통합공모를 시작했다.
이 제도를 통해 2020년~2022년까지 총 8차례 공모를 진행해 30개 사업이 선정됐고 33개 업체가 시범사업자로 뽑혔으나 2월 현재 정식 전력화(양산사업)를 위한 계약까지 체결된 사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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